항목 ID | GC04203422 |
---|---|
한자 | 尹興信殉節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Cherishing the Patriotic Death of Martyr Yun Heungsin |
이칭/별칭 | 첨사 윤흥신 순절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2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한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윤흥신 순절비(尹興信殉節碑)는 1841년(헌종 7) 4월 동래 부사 홍종응(洪鍾應)이 임진왜란 때 다대포 전투에서 싸우다 순직한 다대 첨사 윤흥신[?~1952]의 업적이 전해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윤흥신의 업적이 알려지게 된 과정을 적고 업적을 기록하였다.
[위치]
윤흥신 순절비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윤공단에 들어서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그 끝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24번지이다.
[형태]
대좌(臺座)는 하대석이고, 개석은 가첨석이다. 이수(螭首)는 처마선이 두껍고 높이가 낮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지붕의 가운데에는 첨석이 같은 간격으로 올려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첨사 윤공 흥신 순절비(僉使尹公興信殉節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지난 임진년의 변란이 있었을 때 동래가 처음으로 그 창날을 맞았는데, 동래 주변 진영을 지킨 십여 명의 신하들 가운데 순절로 가장 알려진 사람이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의 정발(鄭撥)이라고 한다면 다대포에는 곧 윤흥신 공이 있다. 이분들은 동래의 순절한 신료들이다. 그래서 동래부 사람들이 충렬사를 세워 송공과 정공 두 분을 제향하고 있지만, 윤공은 그 집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처음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였을 때 군사를 나누어 다대진을 포위하자 공은 힘을 다해 이를 물리쳤다. 그때 부하가 아뢰기를 ‘적이 반드시 다시 몰려올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은 그를 꾸짖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적병이 크게 모여들자 군진이 결국 무너졌고, 공 혼자 종일토록 적을 향해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 그 뒤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이 『조망록(弔忘錄)』을 만들어 그 일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였다고 한다.
공은 찬성공(贊成公) 윤임(尹任)의 아들이다. 형제가 여섯인데 그중 셋째가 을사년의 사화에 관여되었다. 공이 다대진에 부임할 때 서제(庶弟)인 흥제(興悌)가 따라왔다. 적들이 공을 포위하여 칼날이 어지럽게 떨어질 때 흥제가 공을 껴안고 함께 죽었는데, 껴안은 것이 너무 견고하여 끝내 풀지 못하고 같은 관에 넣어 묻었으니, 그 얼마나 기이하고 장렬한 일인가!
100여 년 뒤에 나의 선대부(先大夫)께서 동래 부사가 되셨고, 이어서 바다 건너 일본으로 사신을 다녀왔으므로 공의 일을 매우 익숙하게 알고 계셨다. 송공과 정공의 사당에 공이 빠져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조정에 아뢰었는데, 오래 뒤에 마침내 그 일이 시행되었다. 첨사(僉使) 이해문(李海文)은 일본으로 사신 갈 때 당시 부사(副使)이었다. 그가 이 다대진으로 부임할 때 선대부께서 공의 사적을 기록하여 주었는데, 그 글을 벽에다 걸어 놓고 또 비석을 세우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 해문이 관직에서 떠나 버렸고, 그 뒤에 이 진을 맡은 자들이 모두 속된 관리들이어서 이 일에 관해 말할 위인들이 못되었다. 못난 내가 일찍이 이 첨사가 남긴 비석을 찾아보았으나 다대진 사람들이 아는 사람이 없었다. 향후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염려되어 이 글을 지어 두고 이 첨사와 같이 절의(節義)를 사모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보국숭녹대부 판돈령부사 겸 이조 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조진관 지음.
나 종응(鍾應)이 옛 장산국(萇山國)의 수령으로 나올 적에 지금의 재상이신 운석(雲石) 조공(趙公)께서 글을 써서 주시기를 ‘동래부에 충렬사가 있는데, 예로부터 송공과 정공 두 충신을 배향해 왔고, 거기에 윤공을 함께 모신 것은 나의 선대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선군자(先君子)께서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는데 돌에 새기는 일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해 애석하다. 그대는 나를 위해 이 일을 시도해 달라’ 하였다. 내가 이곳에 부임해 와서는 전해 오는 사적(史蹟)에 감동되어 급히 돌을 캐어 세운다. 그렇다! 실추된 전범(典範)을 고치고 빠뜨려진 일을 보충하는 데 대개 운석공이 선인의 뜻을 잘 이어받았고, 충성과 절의를 드러내는 일은 수령의 책임이니, 이것을 함께 이룬 것을 기뻐하노라.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축년[1841] 4월 부사 홍종응이 쓰다[昔在龍蛇之變 東萊首嬰其鋒 環東萊鎭守之臣十數 其殉節㝡著者 地主宋象賢 釜山鄭撥 多大浦則尹公興信 是爲東萊□□臣 府人立忠烈祠 祀宋鄭兩公 公則旌于家 始倭陷釜山 分兵圍多大 公力却之 軍吏進曰 賊必悉至 莫如避 公叱曰 有死而已 明日賊大集 軍遂潰 公獨終日射賊 城陷死之 其後 八谷具公思孟 爲吊亡錄 紀其事甚備云 公 贊成任之子 兄弟六人 其三人者 與於乙巳之禍 其赴鎭也 有庶弟興悌 從焉 及賊逼公 白刃亂下 興悌抱公同死 握固終不釋 遂同棺而窆 何其奇且烈也 後百有餘年 我先大夫 守萊府 繼泛東槎 知公事甚熟 愍其闕於宋鄭之祠 白于朝 久之事竟施 李侯海文 槎上客也 及莅此鎭 先大夫記公蹟與之 旣揭壁 又將竪碑 會海文去官 其後守鎭者 皆俗吏 不足語此事 不侫 嘗訪李侯之石 而鎭人無知者 懼斯役之不成 作此文 竢夫慕義如李侯者云 輔國崇祿大夫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事 趙鎭寬撰 鍾應出守萇山 今相國雲石趙公 贈之以言曰 萊府有忠烈祠 舊享宋鄭兩臣 其竝腏尹公 自吾先大父始 先君子實紀其事 惜貞珉之刻 尙此闕焉 子其爲我圖之 及莅是地 感念遺蹟 亟伐石以竪 噫 修墜典補軼事 盖雲石所以克濟先志 闡忠表節 亦守臣責 遂樂與之成 崇禎紀元後四辛丑四月日 知府洪鍾應書].”
[현황]
윤공단의 중앙에 세워져 있다. 양쪽에는 윤흥제 비(尹興悌碑)와 순난사민비(殉亂士民碑)가 각각 세워져 있다. 부산광역시 사하구청에서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윤흥신 순절비는 임진왜란 때 다대포 전투에서 싸우다 순직한 윤흥신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윤흥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