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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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廉周用 |
영어음역 | Yeom Juy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1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근현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
[활동 사항]
염주용(廉周用)[1911~1953]은 1911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27년 일본에 유학하여 문학의 기초를 닦았다. 귀국 후 『조선 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에 장편 소설이 입선하고, 시가 당선되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어서 『개벽』, 『별건곤』, 『조광』 등 유수 월간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였다. 그 후 중국 동북[둥베이]으로 건너가 1936년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였다. 이때 함께 지낸 인연으로 시인 유치환(柳致環), 언론인 정성수(鄭聖壽) 등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37년 염주용은 유치환, 장하보(張何步), 박영포(朴永浦), 김기섭(金玘燮), 최두춘(崔杜春), 최상규(崔上圭) 등과 부산 최초의 시 동인지인 『생리』의 동인이 되어 시작에 전념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부산 영도구 대교로[봉래동] 해안통에 있던 자유민보사 옆에 문예신문사를 설립하여 순수 문예 주간지 『문예 신문』을 창간하였다. 염주용은 편집인 겸 주필까지 맡아 4년 동안 『문예 신문』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이 가져온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겨내지 못하고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1953년 세상을 떠났다. 염주용의 나이 42세 때였다.
[학문과 저술]
주요 작품으로는 『부산 일보』에 발표한 시 「송화강(松花江)을 건너면서」, 「나의 별」 등이 있다. 「부산의 노래」, 「동래 행진곡」의 노랫말을 쓰기도 하였다. 시 외에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소재를 찾을 수 없다. 염주용이 참여했던 동인지 『생리』는 시 동인지 『시인 부락』과 함께 ‘생명 의식’이라는 시적 관심을 공통으로 한 유파(流波)로 평가되었고, 여기에 참여한 시인들은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불렸다.
[상훈과 추모]
1927년 이후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장편 소설 「섬진강 애화(哀話)」가 입선하였고, 시 「밟고 간 자욱」이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