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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02
한자 吳永壽
영어음역 O Yeongsu
이칭/별칭 월주(月洲),난계(蘭溪),맥랑생(麥浪生)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순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설가
성별
본관 해주(海州)
대표관직|경력 『현대 문학』 편집장|한국문인협회 소설 분과 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909년 2월 11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0년 4월 - 언양공립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6년 3월 -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2년 - 일본 오사카 나니와중학 속성과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35년 - 일본대학 전문부 중퇴
수학 시기/일시 1937년 - 동경국민예술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1951년 5월 - 경남공립여자중학교 교사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46년 6월 -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지부 회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동부전선 종군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부산중학교 교사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현대 문학』 편집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제7회 아세아 자유 문학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6년 - 현대문학사 퇴사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한국문인협회 소설 분과 위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화 훈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예술원 회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79년 - 「특질고」로 필화를 겪은 뒤 절필 선언. 한국문인협회에서 제명
몰년 시기/일시 1979년 5월 15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9년 10월 - 오영수 문학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3년연표보기 - 오영수 문학상 제정
추모 시기/일시 1996년 - 작가 오영수 문학비와 작품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8년 -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11년 - 오영수 문학관 건립 추진
출생지 오영수 출생지 -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 동부리 313
수학|강학지 언양공립보통학교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222-1
수학|강학지 나니와중학 - 일본 오사카
수학|강학지 일본대학 - 일본 도쿄
수학|강학지 동경국민예술원 - 일본 도쿄
묘소|단소 화장산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 내곡 마을

[정의]

현대 부산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한국 소설사에서 단편 소설의 새로운 미학을 개척한 작가.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월주(月洲)·난계(蘭溪). 목판화로 민중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작가 오윤(吳潤)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오영수(吳永壽)[1909~1979]는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태어났다. 맥랑생(麥浪生)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20년 4월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후 가계를 돕기 위해 향리의 우체국에서 잠시 일하였다. 근대 문인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이 무렵 『동아 일보』와 『조선 일보』에 동시(童詩)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나니와[浪速]중학 속성과를 수료하였고, 1935년 일본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7년에는 동경국민예술원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에서 방랑하다가, 1943년경 귀국한 뒤 아내의 직장을 따라 동래군 일광면 좌천리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백씨(伯氏)인 김범부를 만났으며, 이를 계기로 김동리와 문학적 교분을 쌓았다.

오영수는 1945년 12월부터 경남공립여자중학교[현 경남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면서 동료 교사인 박영한(朴榮漢), 김수돈(金洙敦)과 함께 교우지 『학교 소식』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27년 『동아 일보』에 ‘언양 소년단 오영수’로 투고한 동시 「병아리」 이후, 1949년 「남이와 엿장수」로 등단하기 전까지 발표한 시는 20편을 훌쩍 넘는다. 1946년 6월에는 광복 초기 좌파가 주도한 지역 문단에 맞서 조선청년문학협회 경남지부가 결성될 때 준비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8년 맥랑생이라는 필명으로 『문예 신문』 신춘문예에 시 「호마(胡馬)」가 3등으로 당선되면서 문단에 공식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1949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남이와 엿장수」를 『신천지』 9월호에 게재하였고, 1950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에 「머루」로 입선하여 소설가로 이름을 드러낸 후에는 단편 소설 창작에 주력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동부 전선에서 종군하였고, 1951년 부산중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4년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1955년에 조연현(趙演鉉)과 함께 문예지 『현대 문학』 창간을 주도하면서 편집장이 되어 오랫동안 매체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66년 현대문학사를 퇴사한 뒤 1970년 한국문인협회 소설 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77년에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여 창작에 전념하였다. 1979년 『문학 사상』 1월호에 발표한 「특질고」로 필화를 겪으면서 절필 선언을 하였으며, 이어서 한국문인협회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나 오영수는 한국 소설사에서 단편 소설의 미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소설가로 꼽힌다. 30여 년을 훌쩍 넘는 문학적 이력에 걸맞게 150편에 이르는 단편 소설을 창작하였다. 대체로 자연 예찬과 소박한 향촌의 향수, 한국적인 정서와 인간의 본원적 심성에 대한 탐구, 인정과 긍정의 미학, 휴머니즘의 옹호 등을 오영수 소설 세계의 특징으로 지적한다. 광복기 부산 문학 사회를 이끌며 단편 소설의 새로운 미학을 개척한 오영수는 말년의 뜻하지 않은 필화 사건이 빌미가 되었는지 건강이 악화되어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갯마을』[중앙문화사, 1953], 『머루』[문화당, 1954], 『명암』[백수사, 1958], 『수련』[정음사, 1965], 『오영수 전집』 1-5[현대서적, 1968], 『오영수 대표작 선집』 1-7[동림출판사, 1974], 『황혼』[창작과비평사, 1977], 『잃어버린 도원』[율성사, 1978] 등이 있다.

[묘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 내곡 마을 화장산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55년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 1959년 제7회 아세아 자유 문학상, 197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화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9년 10월 오영수 문학비 건립[울산광역시 남구문화원 정문], 1993년 오영수 문학상 제정[울산매일신문사], 1996년 작가 오영수 문학비와 작품비 건립[언양초등학교 정문], 2008년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 건립[기장군 일광 해수욕장], 2011년 오영수 문학관 건립 추진[울산광역시 울주군] 등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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