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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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盛式 |
영어음역 | Gim Seongsik |
이칭/별칭 | 선장 시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모룡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해양 시인.
[가계]
아버지는 김철수(金哲洙)이고, 어머니는 정명자(鄭明子)이다. 부인은 주정숙이다.
[활동 사항]
김성식(金盛式)[1942~2002]은 1942년 5월 15일 서울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식의 아버지 김철수는 원산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 유학하여 일본대학 법정학부를 졸업하였고, 1930년대에 『조선 일보』, 『동아 일보』, 『신동아』 등에 시, 소설, 아동 문학을 발표하였다.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의 술회에 따르면 김철수는 김정한과 비슷한 시기에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 8월 『조선 일보』 장편 소설 현상 공모 예심 입선자 명단에 둘은 함께 이름을 올려 김철수는 동화 「정의의 가위」가, 김정한은 소설 「사하촌」이 당선되었다. 김철수는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사망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당시 김성식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성식은 바다를 통해 동경과 그리움을 키웠다. 먼저 동화 속의 바다를 만났고, 다음으로 실제의 바다를 갈망하였다. 문학에 대한 김성식의 열망은 소년 시절에 싹텄다. 중학생 시절부터 습작 노트를 남긴 김성식의 문학적 시도는 시, 소설, 희곡, 동시, 동화 그리고 드라마와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특정 장르에 매달리기보다 창작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평생 지속되었다. 다만 시 영역에서 더 빛났을 뿐이다. 김성식의 다양한 문학적 시도는 열린 세계관과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태도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한국해양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상선(商船)의 선장이 되어 넓은 바다를 누비기도 한 김성식은 2002년 3월 19일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성식이 쓴 장편 소설 『일부 변경선(日附變更線)-데이트 라인』은 원고지 1,500장이 넘는 대작으로, 월간 『해기』에 연재하였던 「선상 데카메론」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62년 월간 『소설계』에 해양 단편 소설 「남지나해」를 발표하였고, 「지구촌 女情」[『일요 건강』], 「세계의 旅情」[『부산 일보』] 같은 항해 경험담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통신장 곽복순 씨의 어떤 날」로 『동아 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였으나 탈락하였다.
김성식의 문학은 해양 시에서 일가를 이룬다. 1971년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시 「청진항」이 당선되었다. 당시 김성식은 미국 포틀랜드에 있었다. 이 시기에 쓰인 미발표작 「파도 속을 알몸으로」, 「작은 소망」, 「카프리」, 「해돋이」, 「바다로」 등은 건강한 감수성이 번득이는 작품들이다. 1977년 첫 시집 『청진항』[수문서관]을 펴냈다. 그 후 시집 『바다는 언제 잠드는가』[청하, 1986], 『누이야 청진의 누이야』[빛남, 1991],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바다가 있네』[찬섬, 1995] 등을 발간하였다. 그 밖에도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과 유고로 남은 시가 적지 않다. 김성식처럼 많은 해양 시를 쓴 사람은 한국 문학사는 물론이고 세계 문학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김성식에 대한 평가가 해양 시에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묘소]
김성식의 묘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1동 522번지 한마음선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한국해양대학교 교정에 김성식 시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 은탑 산업 훈장이 추서되었고, 2007년 유고 시집 『김성식 시 전집』[고요아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