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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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調井堰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Jo Jeong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14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명희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에 있는 개항기 조정언의 축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조선 후기 문응빈(文應彬), 송이후(宋頤後) 등 주민들이 척박하던 동래부 북쪽 석전(石田) 벌판을 사서 관청에 바치자 관청에서 공사를 맡아 제방을 만들어 옥토로 변모시켰다. 이에 1827년(순조 27) 문응빈, 송이후 등의 공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조정언 비(調井堰碑)를 세웠다.
[위치]
조정언 비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143-2번지에 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동북쪽 조리못에서 남쪽으로 약 10m 떨어진 좁은 길에 위치한다.
[형태]
비의 크기는 높이 99㎝, 너비 34㎝, 두께 21㎝이다. 이수(螭首)는 없이 비신(碑身)의 상단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조정언 비(調井堰碑)’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동래부 북쪽 조정원(調井員)에 석전이라는 벌판이 있는데, 땅이 습기 없이 말라 있기에 석전이라고 하였다. 지난 병인년 봄에 이곳 사람 문응빈과 송이후가 같은 동네의 강대문(姜待文), 공인득(孔仁得), 유태섭(劉兌燮), 조완각(趙完珏), 강운문(姜雲文), 이유대(李有大)와 함께 방죽 터를 골라 땅을 사들여 바쳤다. 이에 관청에서 맡아 장정을 구해 물길도 트고 둑도 쌓았는데, 둘레가 사백 발이 되었다. 들어간 비용이 200꿰미나 되었으니, 공사는 크지만 비용이 적게 든 것은 공사를 감독하는 방편 때문이었다.
방죽 아래에 논이 사백 마지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가물었던 것이 지금은 비옥하니, 민가에서 그 이익을 본 곳이다. 이는 문응빈과 송이후 두 공이 남긴 은택이니, 어찌 입으로만 전하고 말 것인가? 모두 사실을 기록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를 원하였다. 지금 나에게 와서 글을 청하는 이는 일을 맡아 보고 있는 박내영(朴乃英)이라는 사람이다[府北調井員 有石田坪 暵乾故曰石田 粤丙寅春 故鄕人文應彬·宋頤後 與同里姜待文·孔仁得·劉兌燮·趙完珏·姜雲文·李有大 相堰基而買土呈□ 官司而得丁 且疏且築 周回四百把 冗費二百緡 蓋役鉅而費少者 以其董役之方便也 堰下水田四百斗落 昔旱今沃 民蒙其利 文宋二公之遺澤 奚啻口碑而止 咸願記實永圖不朽 今來請余文者 幹事人朴乃英也]”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숭정 기원후 네 번째 정해년[1827] 단오절 유학 문우해 지음. 유학 문도빈 씀. 도감 유학 문만빈이 표석을 세우는 일을 살핌. □임 강창문·김광옥, 수작 최광인·김광록[崇禎四丁亥 端陽 幼學 文禹海 識 幼學文道彬書 都監 幼學 文萬彬 □相標石役 □任 姜昌文 金光玉 首作 崔光仁 金光祿]”이라고 되어 있다.
[현황]
비석 옆에 조정언으로 보이는 저수지가 있다. 현재 이 저수지는 연꽃 소류지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발길이 잦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