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34 |
---|---|
한자 | 三國時代-地域中心文化移動 |
영어의미역 | Cultural Transfer of the Regional Center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백승옥 |
[정의]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중심 문화 이동과 중심 세력 집단의 변화.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연산동 고분군 축조 세력으로의 중심 이동]
고대 부산 지역의 중심 세력이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세력으로부터 연산동 고분군 축조 세력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1.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의 동래 중심가 북쪽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 상에 위치하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낮은 지대에는 널무덤 등 이른 시기의 고분이 축조되어 있으며, 고분군 정상부 쪽은 4~5세기 대의 고분이 만들어져 있다. 고분의 규모나 유물의 성격 등으로 비추어 보아,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 부산 지역을 지배 통치했던 독로국(瀆盧國) 수장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수장급 무덤은 대체로 5세기 중엽 무렵이 되면 축조가 중단된다. 분묘의 입지 조건으로 보아 10·11호분이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있어서 최후의 수장묘인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후엽 무렵에 축조된 부산 복천동 고분군 1호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지만 이를 수장묘로 보기는 어렵다. 봉분의 규모와 부장품의 질과 양, 특히 구릉 아랫부분의 서쪽 사면에 축조된 입조 조건 등으로 보아 그렇다. 그러나 금동관이 껴묻거리로 묻혔다는 점에서 고분의 주인공은 수장에 버금가는 지배자임이 틀림없다. 수장묘가 아닌 분묘는 5세기 중엽 이후에도 구릉 능선부의 빈 공간과 사면에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이들도 5세기 후엽이 되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후의 지배자 집단의 분묘는 동래 연산동 고분군 지역으로 옮겨갔다.
2. 연산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연산동 일대의 구릉에 위치한다. 황령산[해발 427.9m]에서 북쪽으로 뻗은 지맥에 속하는 산봉우리의 하나가 배산이다. 연산동 고분군은 배산[해발 254m] 북쪽으로 뻗어 나온 해발 50m 전후의 완만한 구릉에 위치한다. 구릉 정선부에 봉분이 있는 10기의 중심 고분들과 서쪽 사면의 중소형 고분 수십 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
연산동 고분군의 축조 순서는 구릉의 아래쪽에서 순차적으로 위쪽으로 축조되었다. 중심 고분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대에 축조되었으며, 주변의 소형 고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돌덧널무덤들이다. 따라서 중심 고분으로 본다면 연대적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바로 후속해서 축조된 것이다. 연산동 고분군 축조 집단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집단과 동일 집단으로 생각되며, 한정된 묘역에서의 고분 축조가 끝나자 묘역을 옮겨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 시대 부산 지역 중심 지배 세력 묘역의 이동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