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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76
한자 李東姬
영어음역 Yi Donghui
분야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44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육자
성별
대표경력 부산유치원 원장
출생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9년 - 경성보육전문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7월 1일 - 부산유치원 원장에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창원시
학교|수학지 경성보육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유치원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가 44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여성 교육자.

[가계]

1917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아버지 이순상(李舜相)과 어머니 신덕순(辛德順)의 2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숙부는 시조 시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다.

[활동 사항]

이동희(李東姬)는 마산 의신여학교를 다녔다. 1935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만인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보육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보육학을 전공하겠다는 소신과 독신 선언의 내용이 담긴 편지만을 남긴 채 바로 서울로 갔다. 이동희의 독신 선언은 평소 남편의 폭력과 외도에 저항하지 못하는 큰언니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 데서 비롯되었다고 이동희는 회고한 적이 있다. 서울 경성보육전문학교에 입학한 이동희는 1939년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마산으로 돌아와 문창교회 부설 의신유치원에서 유치원 보모를 시작하였다.

당시 유치원에서는 일본어와 일본 교구를 사용해야 했으나, 그녀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며 김유신(金庾信)이나 이순신(李舜臣)과 같은 한국의 위인들을 가르쳤다. 이 일로 인해 일본 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아야 했으며, 학부모들과의 충돌로 부산과 충무 등지의 유치원을 수시로 옮겨 다녀야만 하였다. 결국 어느 유치원에서도 그녀를 받아 주지 않는 상황이 되어, 1942년 9월 언니 내외가 있는 중국 하얼빈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봉천보육전문학교 교수 겸 순회 보육자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방이 되자 부산에 정착한 이동희는 1946년 7월 1일 한국 최초의 공립 유치원인 부산유치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1947년에는 경상남도 보육협회를 결성하고, 유치원 교사 교육을 위해 ‘어린이 교육 강습회’를 열었다. 1948년에는 부산보육전문학원 인가를 받아 전문적인 유치원 교사 양성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유치원은 사실상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이동희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부산유치원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모적인 기관을 폐쇄한다는 부산시의 방침으로 인해 부산유치원은 매각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동희는 경상남도 지사의 도움으로 부산유치원을 3년간 임대할 수 있었고, 이후 1962년에는 완전히 사립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동희는 유치원 아동들의 풍부한 감성을 키우는 활동을 중시하여, 자신이 창작한 율동을 아이들에게 직접 지도하고 아동극도 연출하였다. 그녀가 연출한 아동극으로는 숙부인 이은상이 쓴 「꽃동산」 이외에도 「눈」, 「세종대왕」, 「빨래」 등이 있다. 평생을 아동 교육에 헌신했던 이동희는 1977년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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