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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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土器 |
영어의미역 | Earthenwar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영민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삼국 시대의 흙그릇.
[기능과 용도]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삼국 시대의 그릇류는 대개 흙으로 빚어 만든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기(木器)류도 사용되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삼국 시대가 되면 토기 가마가 발달함에 따라 평요(平窯)에서 등요(登窯)로 개량되어 소성 온도가 높아져 비교적 단단한 토기가 생산되었다. 도자기처럼 단단한 토기라는 의미로 삼국 시대의 토기를 도질 토기(陶質土器)라고 한다. 도질 토기는 표면이 회청색을 띠며, 주로 식료품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편 도질 토기와 달리 적갈색의 토기도 제작되었는데, 도질 토기에 비해 무르다고 하여 연질 토기(軟質土器)라고 불린다. 연질 토기는 주로 음식을 조리하는 용도, 즉 생활 토기로 사용하였다. 연질 토기의 표면에는 불에 의해 그을린 흔적과 내면에는 음식의 조리 과정에서 생긴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도질 토기는 주로 부장용으로, 연질 토기는 주로 조리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두 계통의 토기는 삼국 시대의 생활 유적과 무덤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사용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종류와 형태]
부산 지역에서 확인되는 삼국 시대의 토기는 모양에서 가야식 토기와 신라식 토기로 구별하기도 한다. 가야식 토기는 곡선미가 강조되어 섬세한 느낌을 주는 반면, 신라식 토기는 직선적인 경향이 강하다. 가야식 토기는 주로 4세기를 중심으로 확인되며, 신라식 토기는 5세기부터 부산 지역에 유입되어 사용되었다. 대개 부산 지역의 토기는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11호에서부터 신라식 토기로 전환되는 현상이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기종은 목 긴 항아리[장경호(長頸壺)]와 굽다리 접시[고배(高杯)]라고 할 수 있다. 5세기 이후부터 신라화하기 시작한 부산 지역의 토기 문화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11호 단계인 5세기 중엽부터는 완전히 신라와 동일한 형태의 토기가 일반화되었다.
[특징과 의의]
부산의 삼국 시대 토기는 가야와 신라의 정치적 영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따라서 4세기 이후 토기 문화의 변천 과정은 부산 지역이 가야 세력권에서 신라 세력으로 편입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삼국 시대의 토기가 정치적 영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산 지역의 삼국 시대의 토기 변화상은 당시의 정치적 판도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