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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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琪淙 |
영어음역 | Bak Gijong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개항기 부산 출신의 지방관 및 경제인.
[가계]
본관은 밀성(密城). 증조할아버지는 박운홍이고, 할아버지는 박춘언이며, 아버지는 박영순이다. 아버지가 동래부의 무청(武廳)인 장관청 소속 초관(哨官)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무신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오씨이다. 큰아들은 박종규로 일본 사도광산학교를 졸업하고 광무국 주사, 동래감리서 주사, 삼화감리서 주사, 함양 군수, 밀양 군수 등을 지냈다. 차남은 수륜원 주사 박창규이다. 사위는 구포은행을 설립하는 등 부산의 근대 경제를 이끌었던 윤상은이다.
[활동 사항]
박기종(朴琪淙)[1839~1907]은 1839년(헌종 5) 11월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일본 쓰시마[對馬]와의 무역을 전담하던 8명의 상인 집단인 팔상고(八商賈)에 드나들며 상업에 종사하였다. 사위 윤상은의 회고에 따르면 박기종은 동래상고도중(東萊商賈都中)에 출입하면서 일본어와 장사를 배워 조선 상인과 일본 상인을 연결시켜 주는 거간(居間)을 하였다. 1869년(고종 6) 동래부 소통사(小通事)[하급 통역관]에 임명되어 거제도 옥포의 업무를 담당하는 옥포 통사로 근무하였다. 1871년(고종 8)까지 소통사로 군무하였다.
일본어를 잘한 덕분에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조선에서 김기수(金綺秀)를 단장으로 한 제1차 수신사 파견 때 동행한 4명의 통사 중 한 명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4년 후인 1880년(고종 17) 6월 김홍집(金弘集)이 제2차 수신사로 도일할 때도 통사로 동행하였다. 두 번의 일본 방문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 현장을 목격한 박기종은 자연스럽게 조선이 잘살려면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생각은 후에 학교 설립과 근대적인 기업 설립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기종은 부산 지역의 치안과 무역 업무를 담당하면서 근대적 기업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886년(고종 23) 부산판찰관(釜山判察官)[부산항 경찰관]에 임명되었다. 재직 중 기선 회사 설립에 착수하여 1889년(고종 26) 4월 통리아문으로부터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회사 설립에는 부산항 감리서 관원과 일본인들도 참여하였다.
1890년(고종 27) 기선 운항을 시작하여, 주로 낙동강 연안의 포구들을 왕래하였다. 1년 반 정도 지났을 때 기선이 낙동강 하구에서 강풍에 침몰하여 경영 위기를 맞게 되자 박기종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연안 항구들을 경유하는 새 항로를 개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선 회사는 1893년(고종 30) 무렵 일본 대판상선주식회사, 조선기선주식회사 등과 협동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이에 박기종은 기선 운항권을 내주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1895년(고종 32) 정부의 명으로 부산항의 영업세 징수 기관인 상무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징수 특권이 사라지자 상무소는 차츰 조선 상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회 조직으로 변하였고, 이름도 동래상업회의소로 바뀌었다.
박기종은 학교 설립에도 눈을 돌려, 공동 출자 형식으로 부산 최초의 신식 학교인 개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성학교는 조선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연 일본어 전문학교로, 1897년(고종 34) 공립 학교로 인가 받아 학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일본 외무성의 보조금도 받는 등 설립 동기에서 벗어나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898년(고종 35) 박기종은 외부 참서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해 윤기영과 함께 ‘국가를 부강케 함은 상무가 제일이요, 상무를 흥왕케 함은 철도가 제일이다’라는 취지 아래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였다. 부하철도회사의 첫 번째 목표는 부산항에서 하단포까지 화물 수송을 주로 하는 6㎞[15리] 길이의 경편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단포는 구포와 함께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해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물산이 집결하는 장소로, 여기에 모인 물산은 다시 육로 또는 연안 항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운반되었다. 당시 하단포와 부산항 사이에는 대티 고개라는 높은 고개가 있어 육로 운송이 어려웠다. 연안 항로도 만만치 않아 바다와 강이 만나는 몰운대 인근 앞바다는 풍랑이 심해 선박의 난파 사고가 잦았다. 박기종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부산항과 하단포 사이에 경편 철도를 부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철도로 옮긴 물품은 부산항을 통해 일본 등으로 수출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박기종 등은 이런 계획 아래 철도 회사를 설립하고, 농상공부에 건설 인가를 요청하였으나 철도 부설은 무산되었다. 1차 원인은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 것이고, 일본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경부선 부설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 철도는 하단포 상류의 구포와 부산항까지 연결될 계획이었다. 부하 철도는 비록 건설되지 못했으나 부산을 기반으로 한 조선인에 의해 기획된 최초의 철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1899년(고종 36) 박기종은 주요 철도를 직접 건설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경원선과 함경선 부설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사장은 당시 대신이었던 이하응, 이재순(李載純), 민영철(閔泳喆) 등이 차례로 맡았으나 실무자는 박기종이었다. 또한 대한철도회사라는 이름으로 만료된 프랑스의 경의 철도 부설권도 따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대한 자금 조달이 걸림돌이 되었다. 고종(高宗)이 개인 돈인 내탕금(內帑金)을 내겠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료들의 봉급 중 일부를 주식 형태로 출자하도록 하였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경원 철도 부설도 주식 출자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이에 박기종은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다. 일본 측은 철도 부설권 획득을 목적으로 접근하여, 계획대로 철도 부설권들을 손아귀에 넣었다.
박기종은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 철도 건설 계획을 세워 영친왕궁에 보호를 요청하고, 철도 건설을 담당할 영남지선철도회사도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일본 자본을 끌어들여 일본 측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열차 운행도 회사 부채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일본이 담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박기종의 철도 부설 노력은 일본의 조선 진출에 길을 터 준 결과가 되어 버렸다.
[묘소]
박기종의 묘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에 있다.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선산에 묻혔다가 부산진 매축 공사 때 이장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기종은 『상경 일기(上京日記)』와 『도총(都總)』이라는 책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공단(鄭公壇) 내에 행경찰관 박공기종 영세 불망비(行警察官朴公琪淙永世不忘碑)와 행첨사 박공기종 영세 송덕비(行僉使朴公琪淙永世頌德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