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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40
한자 朴次貞
영어음역 Bak Chajeong
이칭/별칭 박철애,임철애(林哲愛),임철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1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선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출생 시기/일시 1910년 5월 8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5년 4월 - 동래일신여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9년 3월 - 동래일신여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9년 7월 30일 - 근우회 중앙 집행 위원회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 근우회 사건 배후 지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중국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김원봉과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32년 10월 20일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5년 7월 - 조선민족혁명당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6년 7월 16일 - 조선민족혁명당 남경 조선부녀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6년 무렵 - 만국 부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38년 10월 10일 -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9년 2월 -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함
몰년 시기/일시 1944년 5월 27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 8월 15일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6년 8월 - (사)박차정의사숭모회 설립
추모 시기/일시 2001년 3월 1일 - 박차정 동상 건립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0년 1월연표보기 - 근우회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17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17
학교|수학지 동래일신여학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0지도보기
활동지 근우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의열단 - 중국
활동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 중국 난징
활동지 민족혁명당 - 중국 난징
활동지 조선의용대 - 중국 난징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관련 유적 박차정 의사 생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19지도보기
관련 유적 박차정 동상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 문화 회관 만남의 광장 내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아버지 박용한은 순종 때에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 기사였으며, 일제의 무단 통치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1918년 1월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어머니 김맹련은 기장 출신의 항일 운동가 김두봉(金枓奉)과 사촌이고, 김약수(金若水)[김두전]와 육촌 형제이다. 형제자매는 박문희(朴文熺)·박문호·박문하·박수정이다. 오빠 박문희신간회에서 활동하였고, 박문호는 의열단에서 활동하였다. 항일 운동의 과정에서 박철애, 임철애(林哲愛), 임철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박차정(朴次貞)[1910~1944]은 1910년 5월 8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17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1925년 4월 호주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할 무렵 동래 지역은 항일의 기세가 전국의 어느 지방 못지않게 충만해 있었다. 박차정의 항일 의식은 이러한 동래 지역 사회와 학교 분위기로 더욱 견고해지면서 동래일신여학교의 동맹 휴교를 주동하는 등의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학창 시절의 철저한 항일 의식과 투쟁 정신은 오빠인 박문희, 박문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박차정의 항일 의식은 1924년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고 이듬해 동래일신여학교를 입학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본격적으로 여성 운동과 민족 운동의 주도층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근우회 활동이었다. 1927년 5월 근우회가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면서 동래 지역에도 1928년 5월 19일 근우회 동래지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7월 30일 근우회 동래지회 중앙 집행 위원회에서 중앙 상무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선전 조직과 출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근우회 동래지회와 도연합회 규칙 세칙 제정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후부터 근우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근우회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에서 박차정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우회 사건은 박차정과 허정숙 등이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 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 땅으로 망명하였다.

박차정은 상하이(上海)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서 활약하였다. 1931년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였고, 1932년 근거지를 중국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1932년 10월 20일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여자부의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이 학교의 교가도 박차정이 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박차정은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의 기관지였던 『우리들의 생활』, 『민족 혁명』, 『반도』등의 발행에 관여하였다. 1936년 7월 16일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남경 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민족 해방 운동에 편입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한구(漢口)에 머무르면서 만국 부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또한 장사(長沙)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하였으며, 오랜 옥고 끝에 숨진 안창호(安昌浩)의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박차정은 『조선 민족 전선』에 실은 글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과 조선 및 일본 민중의 적이므로 반드시 긴밀하게 연합하여 공동의 적을 타도하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 일본의 혁명 대중들은 일본 국내에서 혁명전쟁을 일으켜 파쇼 군벌을 제거하여 자유와 해방을 얻으라고 역설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한국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9년 2월 강서성(江西省) 곤륜산(崑崙山)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하였으며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차정은 생전에 잡지 『조선 민족 전선』에 「경고(敬告)」[창간호, 1938], 「일본적 혁명 대중(日本的革命大衆)」[제3호, 1938], 「조선 부녀와 부인 운동」[제5·6호, 1938]이라는 글을 실었다.

[묘소]

광복 후 남편인 김원봉이 귀국하면서 박차정의 유골을 가져와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자신의 본가 뒷산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8월 (사)박차정의사숭모회가 설립되었으며, 2001년 3월 1일 박차정 동상이 건립되었다. 2005년 7월 8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19번지박차정 의사 생가를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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