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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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영어음역 | Yujeong |
이칭/별칭 | 사명(四溟),사명 대사(四溟大師),유정 대사(惟政大師),임응규(任應奎),이환(離幻),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연주 |
[정의]
1604년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3,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온 조선 시대의 승려이자 승병장.
[개설]
본관은 풍천(豊川).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峰). 유정(惟政)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활동 사항]
유정[1544~1610]은 1544년(중종 39)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유정은 임진왜란 때에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서 부산에 머물렀다. 첫 번째는 1594년(선조 27)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영중(營中)을 3차로 정탐할 때였다. 그러나 정탐을 마치고서는 부영(釜營)과의 사무 연락 때문에 울주를 통하지 않고 동해안을 통해 기장, 송정, 해운대 길을 통한 것으로 추측된다.
두 번째는 1601년 부산진성을 수축할 때였다. 앞서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陣中)을 탐정하고 나서 유정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이 부산진성의 수축이었다. 세 번째는 1604년에 왕명을 받들고 일본으로 갈 때였다. 1604년 2월 21일 스승인 휴정 대사(休靜大師)의 열반(涅槃)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비변사(備邊司)를 통하여 전교(傳敎)로 대마도(對馬島) 파견의 명이 내려졌다.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유정을 임명하여, 탐적사(探賊使)로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1604년 7월 1일 유정은 서울을 떠나 다시 부산으로 향하였다. 1604년 8월 2일 나라의 명을 받고 대마도로 떠날 때까지 약 1개월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그때도 유정은 몇 년을 두고 자기가 쌓아 올린 부산진성, 감만포, 좌수영을 순회하며 점검하였다. 곧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담판에서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에 잡혀간 3,000여 명의 포로와 같이 동행하였던 승려 삼준상인(三俊上人)·법원상인(法源上人)·혜구(惠球)·혜은(惠誾)·준사(俊師) 등과 함께 1605년 4월에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 대사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에 병을 얻어 합천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에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유정은 유불(儒彿)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스승인 휴정의 선맥(禪脈)을 잇고 있다. 그리고 정토 사상(淨土思想), 화엄의 성기원융관설(性起圓融觀說)과 선교(禪敎) 일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어릴 적에 유교 교육을 받아 유교적 소양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고, 현실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자 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때 멸사보국(滅私報國)의 구국 정신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 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다.
[묘소]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비와 부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1880년(고종 17) 여름에 부산 첨사(釜山僉使) 임형준(任衡準)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유정의 활약상을 알리고 후대에 널리 충의를 기리기 위해 유정 대사 충의비(惟政大師忠義碑)를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유정 대사 충의비’라고 새겨져 있다. 이수는 비신과 별개의 돌로 두껍게 제작되어 얹혀 있으며, 모양은 팔작지붕을 닮아 양끝이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수의 윗부분은 위쪽으로 n자 식으로 돌출된 것이 두 개 있고, 하대석이 있다. 유정 대사 충의비는 현재 부산진구 초읍동 43번지 부산 어린이 대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