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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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慧星 |
영어음역 | Gim Hyeseong |
이칭/별칭 | 김지하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지현 |
[정의]
부산 지역 최초의 발레단인 푸리마발레단을 창립한 여성 무용가.
[활동 사항]
김혜성(金慧星)[1920~1988]의 본명은 김지하이다. 1937년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지오다여자대학[千代田女子大學] 가정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 유학은 김혜성이 무용을 배우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 아버지에게 허락받은 것이었지만,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무용을 배우기 위해 세계적인 발레리나인 에리아나 파블로바를 찾아갔을 정도로 무용에 대한 열정이 강하였다. 김혜성은 8살 때에 발레리나인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의 발레 공연을 담은 「빈사(瀕死)의 백조」라는 영화를 보고 춤에 빠져들게 되었다.
김혜성은 파블로바에게 1938년에서 1940년까지 발레 지도를 받았으며, 지오다대학 학예회 때 가정과 학생으로서 이례적으로 발레 솔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경기도 개성공립고등여학교에서 가사와 무용을 가르쳤다. 결혼 후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정착한 김혜성은 1947년 11월에 부산 극장에서 경남애국부인회의 주최로 부산 최초의 발레 공연을 했다. 김혜성은 슈베르트의 곡에 맞추어 「장미와 처녀」라는 모던 발레 공연을 하였다. 이때 얇은 타이즈에 발레복을 입은 김혜성의 모습을 본 관객들은 발가벗고 춤을 춘다며 욕설과 고함을 쳤는데, 관객들이 그때까지 발레 공연을 거의 본 적이 없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이후 1952년 부산 극장에서 「오페라 꽃신」과 「쌍선무」를, 1955년에는 대영 극장에서 「가을의 여심」을 공연하였다.
1960년 11월 11일에 김혜성은 부산 최초의 발레 공연 단체인 푸리마발레단을 결성하여, 제일 극장에서 일 년여의 준비 끝에 창립 공연을 선보였다. 물론 푸리마발레단의 공연 이전에도 부산에서 조혜경[1958년]과 김향촌[1958년·1959년]의 현대 발레 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공연은 개인적인 발표회 성격의 공연이었고, 창작 무용을 공연하기 위하여 조직된 전문 단체로는 푸리마발레단이 최초였다. 특히 이 공연은 대담한 소재로 색다른 경지를 개척하였고, 새로운 무대 미술을 선보이며 안무의 창작성을 모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푸리마발레단은 대구 초청 공연을 비롯하여 1968년까지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공연을 하였다.
1967년 김혜성은 부산 무용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시 문화상[무용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김혜성은 1962년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서면 교차로에 세워진 부산탑의 조각 모델을 하기도 하였다. 1957년부터 부산시 문화 위원으로 일했던 김혜성은 무용 활동 이외에도 경제력으로 어려운 부산의 문화 예술인들을 후원하기도 했으며, 노년에는 지역 여성들의 단합과 교양을 위해 국제부인회 회장과 BPW(Business & Professional Women)의 회장직을 맡았다. 김혜성은 1988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논평 「군무 정신과 한국 무용계」가 『민주 신보』[1962. 6. 25]에 실렸다.
[상훈과 추모]
1967년에 부산시 문화상[무용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