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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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鶴成 |
영어음역 | Gim Hakseong |
이칭/별칭 | 가네코 사부로[金子三郞]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욱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활동 사항]
김학성(金鶴成)[1911~1958]은 1911년에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가네코 사부로[金子三郞]이다. 1941년에 일본 동양음악학교 본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전 25살이던 1936년에 노소전(盧少全)과 결혼하여 이듬해 장남 김준오[전 부산대학교 교수]를 낳았다. 당시 김학성은 부산 항서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있었고, 노소전은 성가 대원이었으며, 주례는 항서교회 목사이자 이후 남성재단·훈성재단 이사장이 된 김길창(金吉昌)이 맡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학성는 1942년 3월에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부산 극장에서 연 이후에 제2회[1949년 7월, 동광초등학교], 제3회[1953년 5월, 남성여자고등학교 강당], 제4회[1955년 4월, 영남 극장] 바이올린 독주회를 연이어 개최하였다. 그 후 김학성은 일본인 우쯔노미야[宇都宮幸三]가 단장으로 있던 부산방송관현악단의 악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김학성은 자신의 제자를 중심으로 약 20명 규모로 조직된 부산 최초의 부산실내악단을 운영하는가 하면,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에 ‘바이올린의 집’이라는 현악 연구소를 차려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이때 김학성의 지도를 직접 받았던 이들 중에는 임만규[전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학장]·김호현[전 부산시립교향악단 악장]·전성태[전 부산MBC 초대 FM부장) 등이 있었다.
8·15 광복 후 1946년에 김학성은 부산사범학교 교사로 잠시 머물다 1947년 4월 부산 최초로 부산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부산관현악단은 김학성의 제자들과 일본 유학을 다녀온 임문규(林文圭),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한 안정기(安正基) 등 18명을 규합해서 만든 단체였다. 창단 연주회는 1947년 4월 14일부터 15일까지 부산방송국과 부산일보사 후원으로 동광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김학성이 직접 지휘봉을 들고 훈련하였으며, 5회의 정기 연주회와 마산·진주 등 수차례의 순회공연도 가졌다. 관현악단을 악극단 정도로 인식하였던 당시 중등 학교장과 지역 유지를 설득해서 청소년들에게 직접 음악을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48년에는 부산음악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해 『부산 일보』 2월 20일자와 3월 25일자 광고에 의하면, 학원의 가교사가 부산시 신창동 1가 34번지에 있었고, 모집 정원은 성악 30명, 바이올린 40명, 피아노 50명 등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 김학성은 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에 출강하였고, 경남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동아대학교에 출강하는 등 학생들의 음악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57년 3월 11일과 12일에는 부산 용사 회관에서 소프라노 김천애와 함께 ‘2인 음악회’를 경남음악교육연구회 주최, 부산일보사·부산교육위원회·부산문화사업협회의 공동 후원으로 열었다. 경이로운 것은 오전 9시 30분, 오후 1시·3시 30분·7시 30분 등 하루 4회에 걸쳐 연주회를 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학성은 초창기 부산의 서양 음악 문화를 개척하고 수많은 음악 인재들을 길러 내는 한편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지역 음악 문화의 저변 확대를 꾀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왕성한 연주 활동을 벌이던 김학성은 1958년 2월 25일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였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남지회 주관 하에 문총장(文總葬)으로 치러졌다. 1959년 1월 9일 제2회 부산시 문화상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