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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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夏 |
영어음역 | Yongha |
이칭/별칭 | 이학수(李學洙),이시열(李施說),운허(耘虛),이운허(李耘虛),박용하(朴龍夏)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정용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전주. 아버지는 이종빈(李鍾彬)이고, 어머니는 백천 조씨(白川趙氏)이다. 속명은 이학수(李學洙)이나 뒷날 이시열(李施說)로 개명하였다. 법호는 운허(耘虛)이고, 법명은 용하(龍夏)이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와는 6촌 지간이다. 해방 이후에는 이운허(李耘虛)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박용하(朴龍夏)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활동 사항]
용하[1892~1980]는 1892년 3월 23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까지 고향의 회보재(會輔齋)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한일합병이 추진된 이후,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2년 이후 중국 둥베이[東北]로 가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고, 1912년 1월부터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한 것을 시작으로, 흥동학교(興東學校), 배달학교(倍達學校) 등에서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4월부터 12월까지 『한족 신보(韓族新報)』 사장을 지냈다. 1921년 6월부터 12월까지 유점사에서 불교 초등과를 이수하였고, 1924년 5월부터 9월까지 부산 범어사 강원에서 진응(震應)에게 사교과(四敎科)를 배우게 되면서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28년 2월부터 1929년 4월까지 서울 개운사에서 불교 대교과를 이수하였다. 그해 3월에 용하는 청담(靑潭) 이순호(李淳浩)와 함께 조선 불교 학인 대회(朝鮮佛敎學人大會)를 주도하였는데, 이때 범어사의 승려들이 다수 참여하여 대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조선 불교 학인 대회는 조선 불교의 앞날을 도모하는, 한국 근대 불교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조선 불교 학인 대회에서 용하는 좌장 및 대회 의장으로서 행사를 이끌었고, 그 구체적 실천을 위해 학인연맹(學人聯盟)을 조직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용하는 범어사 강사로 활동하였고, 1945년 11월 대한불교 조계종 경기도 교무원장을 지냈다. 용하는 1952년에 범어사 및 공주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능엄경(楞嚴經)』 번역에 착수하였다. 1953년 9월 『한국 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편찬에 참여하였고, 1955년 9월부터 1958년 5월까지 합천 해인사 강사로 활동하였다. 1959년 10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 주지를 지냈고,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 사전』을 편찬하였다. 1964년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이 되어 역경 작업에 헌신하였다. 이로써 용하는 한국 현대 불교의 역경(譯經)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80년 11월 18일 봉선사에서 세수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 『불교 사전』·『불교의 자비』·『불교의 깨묵』·『한글 금강경』·『자비 수참(慈悲水懺)』·『자비 도량 참법(慈悲道場懺法)』·『수능엄경 주해(首楞嚴經註解)』·『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대교지문(大敎指文)』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 경내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문화 훈장을 수상하였고,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