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2292
한자 李年宰
영어음역 Yi Nyeon-jae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대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업인
성별
대표경력 흥아타이어 사장
출생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7년 5월 - 길본제작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조선양산(주)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조선중공업(주)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국제 신문』 사장
활동 시기/일시 1949년 6월 29일 - 부산특별시 승격 운동을 위한 기성회 상임이사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미진건설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제일화재해상보험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흥아타이야(주) 불하받음
활동 시기/일시 1954년 1월 25일 - 초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65년 8월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전라남도 순천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3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활동지 길본제작소 - 일본 오사카
활동지 조선양산 - 부산광역시
활동지 조선중공업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지도보기
활동지 『국제 신문』 - 부산광역시지도보기
활동지 미진건설 - 부산광역시
활동지 제일화재해상보험 - 부산광역시
활동지 흥아타이어 -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상공회의소 - 부산광역시 중구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기업인.

[활동 사항]

이년재(李年宰)는 1911년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나, 14세에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의 양산 공장 등을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비가 많은 일본에서 우산이 장차 헝겊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데 착안한 이년재는 1937년 5월 공업 지대인 오사카에 길본제작소(吉本製作所)를 설립하여 양산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업이 점차 궤도에 오르자 그는 1941년 고국에 돌아와 부산에 정착하였다. 부산진구 서면조선양산(주)을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산을 해외, 특히 동남아시아로 대량 수출하여 성장하였다. 이때 그가 시도해 본 사업이 10개가 넘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남포동에서 동서 이복영(李福榮)과 함께 주식회사 미진상회(美進商會)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회사는 화물선 미진호를 이용하여 무역과 해운업을 하였는데, 한국의 한천과 김을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에서 물자를 수입하여 돈을 벌었다. 특히 소맥분 수입으로 일약 치부의 길이 열리면서 이년재는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년재는 적산[귀속 사업체]이었던 서면의 흥아고무공업(주)를 1949년 12월 공동 관리하게 되었는데, 운크라[국제연합한국재건단] 원조 자금으로 건설한 공장의 규모와 시설은 국내 제일이었다. 이는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을 때 이년재가 한국의 대실업가로 각광을 받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년재는 1952년 정기옥과 함께 흥아고무공업을 공동 불하받아 공동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상호를 흥아타이야(주)로 변경한 뒤, 1954년 자동차 타이어 부분만 분리하여 이년재가 단독 경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년재조선중공업 Co.[1948], 『국제 신문』[1949], 조선석유 Co.의 사장직을 맡고 미진건설[1951], 제일화재해상보험[1952], 『세계 통신』을 창립하는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었다.

1946년 7월 16일 이년재는 임의 단체로 설립된 부산상공회의소 제1회 의원총회에서 광공부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9년 7월 10일 제2대 부산상공회의소 의원부가 구성될 때는 김지태(金智泰)와 치열한 회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김지태가 단독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고배를 마신 이년재는 1952년 9월 17일 제3대 의원부 구성에서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1월 25일 새로 만들어진 상공회의소법에 의한 초대 부산상공회의소 의원부 구성에서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이년재는 지역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김지태 등과 함께 부산에서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1952년 12월 부산대학이 한국민사원조처[KCAC]로부터 교사 신축을 위한 자재를 무상 원조 받았음에도 건축비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사재 1억 8000만 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49년 6월 29일에는 부산 출신 국회 의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부산특별시 승격 운동을 위한 기성회에서 상임 이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1954년 부산상공회의소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자 사재를 들여 이를 매입, 기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은 이년재에게 행운과 불운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 기간에 이년재는 비료 수입조로 15만 1000달러의 중석불[중석을 판매한 대금으로 수금한 달러]을 불하받아 큰돈을 벌었지만, 1952년 6월 4일 중석불로 도입한 양곡과 비료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한 혐의로 입건되었던 것이다. 1953년 5월 22일 결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요된 경비가 적지 않았고, 수사 당국에 기소된 미진상회도 변상 문제로 파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채무로 인해 대부분의 기업을 잃어버리고 단 하나 남았던 흥아타이야(주)도 1962년 산업은행으로 관리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임시 수도 시절 이년재이승만(李承晩)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밀착한 사이였으나 중석불 사건 이후 대통령과도 멀어졌다. 중석불 사건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이년재는 1965년 8월 고혈압으로 뇌수술을 받은 후 55세의 나이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