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1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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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光國求弊不忘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Han Gwangguk’s Sweeping Away of Old Abuses |
이칭/별칭 | 진리 한광국 구폐불망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2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명희 |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조선 후기 다대진 아전 한광국(韓光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한광국 구폐불망비(韓光國求弊不忘碑)는 다대진의 아전 한광국이 1763년(영조 39) 주민의 숙원 사업인 곽전(藿田)[미역밭]의 면세를 실현하는 데 공헌한 일을 기려 1861년(철종 12) 8월 다대 포구의 주민들이 세웠다.
[위치]
한광국 구폐불망비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24번지 윤공단(尹公壇) 내에 있다.
[형태]
비의 크기는 높이 98㎝, 너비 34㎝, 두께 13㎝이다. 대좌는 없고 비석의 상부는 둥글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진리 한광국 구폐 불망비(鎭吏韓光國捄弊不忘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새겼다. “세 가지 썩지 않는 것 가운데 공로를 이루는 것과 덕을 베푸는 것이 그 둘을 차지하지만, 지난날 공로와 덕이 있었는데도 정당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고을에는 미역밭이 있는데 이는 실로 부주(涪州)의 여지(荔枝) 공납……과 같은 병폐인지라, 이 때문에 포구의 여러 민가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다. 공이 이것을 병폐로 여겨 감영과 서울 관청에 진정하면서, 여러 번 빈사할 지경을 겪으면서도 비로소 조정의 허가를 받게 되었으니, 이때가 건륭 28년[1763] 가을 8월이었다.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은 것이 그 얼마인가? 우리 다대진의 관문 방비도 예로부터 후망(候望)하기 힘든 폐단이 있었는데, 이것도 모두 고쳐졌다. 그러므로 공의 공로와 덕은 산수(山水) 간에 가득하니 아마 현한(峴漢)의 비석…… 보다 더 오래갈 것이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유년[1861] 8월 포구 주민들이 세우다. 이원복·왕선웅·이한동·김정지·김시천·김일원·권윤·김작사·김동완, 화주 최상운·김정원·전인복[三不朽 立功立德 居其二 疇有功德而不酬 玆州之有藿田 固非連□□珠之往復 而實是涪荔武芽之瘡痏 數些浦戶 以此幾無 公病之 呈營呈京司 累濱死境 始蒙朝家允旨 乃乾隆二十八年秋八月也 至今受賜 爲如何哉 本鎭關防 古有候望之弊 幷此俱革 然則公之功德 在山在水間 殆壽於峴漢之碑也夫 崇禎紀元後四辛酉八月日浦民立 李元福 王先雄 李漢東 金正之 金時天 金一元 權允 金作沙 金東完 化主 崔尙運 金正元 田仁福].”
[현황]
윤공단 어귀 계단 오른쪽에 이경재 영세불망비(李景在永世不忘碑), 이승운 만고불망비(李乘運萬古不忘碑) 등의 선정비군 12기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한광국 구폐불망비는 조선 후기 포구 주민들의 곽전 공납에 관해 알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