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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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桷橋重築文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Sugak-gyo Bridge |
이칭/별칭 | 현감 장공유풍 수각교 중축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인택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수각교를 만든 경위를 기록한 비.
[건립 경위]
1855년(철종 6) 기장현과 관내 면, 그리고 부자 두 명이 낸 800냥으로 기장 현감 장유풍(張遺豊)이 지역 석재로 4개월간 공사하여 수각교(水桷橋)를 건설한 경위를 설명한 비이다.
[위치]
수각교 중축문비(水桷橋重築文碑)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석재이며, 직육면체 형태로 앞면과 뒷면에 비문을 새겼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현감 장공유풍 수각교 중축문(縣監張公遺豊水榷橋重築文)’이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다리를 만드는 일은 왕도 정치의 하나이니 읍을 다스리는 데 있어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 다리 아래로 큰 하천이 길게 뻗었다. 건륭(乾隆) 연간 1758년[무인년]에 돌을 깎아 얹었으나, 14년 뒤인 1771년[신묘년]에 물이 불어나자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그대로 축조하기 어려워서 백성에게 억지로 재목을 베어 해를 걸러 수리하도록 하였는데, 이제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 더 이상 나무를 구할 수 없는 형편이다.
백성들은 강 건너기가 고달프고, 관도(官途)마저 막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향청(鄕廳), 무청(武廳), 작청(作廳) 등 네 청에서 의연금을 내고 두 부자와 여덟 면에서 희사하여 돈이 팔백 냥이 되었다. 장인을 징발하고 현민(縣民)을 고용하여 넉 달 만인 섣달 보름에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홍교(虹橋)가 아니요 평교(平橋)이다. 그렇다. 사물은 때가 되어야 번성하고, 때는 사람을 만나야 이루어진다. 이 일과 공로를 말하자면 어찌 성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이 돌에 새겨 후세의 귀감으로 삼노라.
건너는 곳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 은혜 두루 미쳐 공덕도 넉넉하다. 한 조각 비석에 새겨 둔 말은 천년토록 길이길이 닳지는 않으리[徒杠之成 王道一政 在乎邑治 可不勉歟 是橋之下 大川長流 乾隆戊寅 斲石虹之 十四年辛卯 被漲見頹 更難仍築 勒斮民木 間年修亙 山今皆赭 勢不取之 民庶病涉 官塗患阻 於是乎鄕武作四廳捐助 兩饒人·八面舍施 錢爲八百緡强 徵工貰民 四閱月臘望訖 匪虹伊平 噫 物待峕興 峕將人就 言其事功 豈不盛幸 肆鐫于斯 以資鑑後 銘曰 不以變濟 惠普德多 一片堪語 千古不磨].”
뒷면에는 “함풍 5년[1855] 을묘년 정월 초하루, 도감 이후서 기, 좌수 신응호, 조역 김종렴, 색리 김정하, 장관 박문회, 이방 최천주, 석공 김대선[咸豊五年乙卯獻歲 都監 李厚瑞記 座首 辛應浩 助役 金宗濂 色吏 金廷河 將官 朴文會 吏房 崔天柱 石工 金大先]”이라고 되어 있다.
[현황]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청이 소유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수각교 중축문비는 1855년 기장현이 수각교를 만드는 과정과 경비 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나아가 당시 사회에서 공적인 공사의 비용이 마련되는 방식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