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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 사리탑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980
한자 釋迦如來舍利塔碑
영어의미역 Stone Monument for Sarira Pagoda of Sakyamuni Buddha
이칭/별칭 석가여래 사리탑비명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사리탑비
양식 탑비
관련인물 영환|상호|이산|운호|봉완|김종원(金鍾遠)
재질 대리석
크기 202㎝[높이]|84㎝[너비]|42㎝[두께]
소유자 범어사
관리자 범어사
건립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건립
현 소재지 범어사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일제 강점기 사리탑을 세운 내력을 새긴 비.

[개설]

석가여래 사리탑비(釋迦如來舍利塔碑)는 석가모니 사리의 영험함을 설명하고 사리가 부산 지역의 범어사로 오게 된 내력과 함께 사리탑을 세운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건립 경위]

범어사 승려 상호가 해인사 사미(沙彌) 영환으로부터 사리 두 과를 헌납 받아 오자 범어사 지사(知寺) 이산이 사리탑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사 운호가 그 유지를 이어받아 1936년 탑을 세우기 시작하여 1937년 준공하였다. 석가여래 사리탑비는 1938년 사리탑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겨 건립하였다.

[위치]

석가여래 사리탑비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 어귀 비림(碑林)에 있다.

[형태]

화강암으로 만든 2단의 대 위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웠다. 비신(碑身) 위에는 이수(螭首)를 올려 용무늬를 조각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202㎝, 너비 84㎝, 두께 42㎝이다.

[금석문]

비 앞면에 ‘석가여래사리탑비명(釋迦如來舍利塔碑銘)’이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부처님이 니련하(泥蓮河) 사라쌍수 나무 사이에서 반열반(槃涅槃)에 드시자 삼매화(三昧火)를 피워서 다비를 하였는데, 사리 8곡[곡은 10말의 용량] 4두가 나왔다. 맑게 빛나는 것이 하나하나 영묘하여 세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것으로도 가히 비교할 것이 없었다. 사람과 천신이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라 찬탄하며 다투어 먼저 뛰어들어 나누어 각각 얻으니 적어도 부족함이 없고 많아도 양을 넘지 않았으니 대저 이것은 곧 색(色)이요 곧 공(空)이니 가는 것이 없고 오는 것이 없으며 절묘한 불가사의의 영험한 구슬이었다.

학이 떠난 나무를 보고 큰 바다에 오르며, 인연을 따라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때가 있지 않아서 인연 있는 국토와 신심을 가진 중생이 있어 다 이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자는 무생(無生)의 참음을 얻을 것이요, 받아 지니는 자는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약 오랜 세월 동안 선근을 묵혀 기르지 않은 자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것을 얻겠는가.

계축년 해인사 사미 영환이라는 아이가 이를 갈 무렵의 나이로 책 상자를 지고 동경(東京)에 갔을 때 천축의 사문(沙門) 달마파라(達磨婆羅)가 석장을 가지고 유행(遊行)하다가 일본에 도달하였는데, 영환이 가서 뵈니 스승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도 마음에 부합하는 것이 있어 간직한 불사리 두 과를 은근히 전하니 영환이 귀하게 여겨 간직하였다.

후에 범어사 승려 상호가 누차 영환에게 청하여 기해년 가을 그 사리를 범어사에 헌납하였다. 지사 이산이 크게 기뻐하여 탑을 세우기를 서원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갑자기 연화대로 돌아가 버린 후 지사 운호가 그 뜻을 계승하여 병자년 봄에 7층 탑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 해 겨울에 준공하여 사리를 봉안하였다.

성지(聖地)가 유명한 지역이나 경치 좋은 곳[名區景勝]에 있지 않고 신령스런 자취에 있으며, 명찰(名刹)이 금전 화각(金殿華閣)에 있지 않고 성스러운 사적에 있다. 조그만 녹원도 푸름이 아직 마치지 않았고, 10홀의 방장도 넓고 커서 끝이 없으니 이와 같이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이다. 범어사는 이때 이르러 이판과 사판[理事]이 복과 슬기가 두루 오르니 가히 끝에 이를 정도로 넓게 드리워졌다.

‘우리 부처님이 가르침을 베푸니 그 문은 항하의 모래처럼 많고 분신은 백억의 몸으로 인연에 따라 그 근원에 마주하네. 하나하나의 사리는 백 천의 석가요, 설하지 않는 설함으로 음성은 사바세계를 진동시키네. 산에 있는 돌을 잘라 사자의 좌석을 마련하니 작아도 작음이 없고 커도 큼이 없다네. 사람과 하늘이 다 모여서 기뻐 찬탄하니 이 공덕으로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셈할 수도 없네.’ 세존응화(世尊應化) 2965년[1938] 무인(戊寅) 삼월(三月) 보름. 용운(龍雲)·봉완(奉玩) 찬(撰), 내산 소인(萊山蕭人) 동□(桐□) 김종원(金鍾遠) 서(書)

[釋迦如來舍利塔碑銘並序 一峕佛 在泥蓮河畔婆羅雙樹間 示入槃涅槃 以三昧火茶毘 出舍利八斛四斗 瀅澈光潤 一一靈妙 世間所有 一切無有可比者 人天歎未曾有 爭先踴躍 隨分各得 寡無不足 多無踰量 夫此卽色卽空 無去無來 殊妙不可思議之靈珠 示離鶴樹 昇大浚海 隨緣度生 無有已時 有緣國土 信心衆生 咸得受益 證此者 得無生忍 受持者 不墮惡道 若非多劫宿植善根者 安能得此 往在癸丑海印寺沙彌英煥甫 以齠齡負笈東京時 天竺沙門達摩婆羅 遊錫四海 到日本 英煥往見 師一見而奇之 心有所契 以所藏佛舍利二顆 慇勤相傳 英煥寶藏之 後梵魚寺僧尙昊 屢請於英煥 己亥秋 以其舍利獻納梵魚寺 知寺梨山 大爲歡喜 誓願起塔 不幸以命未果 遽歸蓮坮 而後 知寺雲湖繼其志 丙子春始工起七層塔 翌年冬竣工 以安舍利 聖地不在於名區勝境 在於靈躅 名刹不在於金殿華閣 在於聖蹟 一抹鹿苑 靑靑未了 十笏方丈 廣大無邊 良有以也 梵魚寺 至是而理事獲彰 福慧兩擧 可垂靡終 銘曰

我佛垂敎 恒沙其門 分身百億 隨緣對根 一一舍利 百千釋迦 無說而說 聲震娑婆 斷石于山 以安獅座 小而無小 大而無大 人天咸集 隨喜讚歎 以是功德 度生無算 世尊應化 二千九百六十五年戊寅 三月望 龍雲 奉玩 撰 萊山蕭人 桐□ 金鍾遠 書].”

[의의와 평가]

석가여래 사리탑비는 제작 연대와 관련 인물들을 알 수 있어 당시 범어사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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