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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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齊明築堤惠民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Honoring Bak Jemyeong |
이칭/별칭 | 부사 박공제명 축제혜민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상로 320-1[덕포동 417-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 부사 박제명(朴齊明)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박제명은 본관이 반남(潘南)이고, 아버지는 박회수(朴會壽)이다. 1831년(순조 31) 2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1833년(순조 33) 6월 이임하였다. 비는 동래 부사로 부임한 지 7개월 후인 1832년(순조 32) 9월 제방을 축조한 박제명의 공을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
[위치]
박제명 축제혜민비(朴齊明築堤惠民碑)는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417-15번지 도시 철도 2호선 덕포역 공터에 있다.
[형태]
몸돌과 받침돌로만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5㎝, 높이 56㎝, 두께 11㎝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부사 박공제명 축제혜민비(府使朴公齊明築堤惠民碑)’이며,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래의 사주(沙州) 한쪽은 낙동강 하류의 요충지에 닿아 있어 비옥한 땅이 비어 놀고 있었다. 지난 1788년(정조 12)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1814년(순조 14) 큰 물난리로 곳곳이 무너져 내려 해마다 침수되는 근심으로 백성들이 안도하지 못하였으나 제방을 쌓을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우리 어지신 부사께서 특별히 먹고살기 어려운 부민들의 형편을 관문(關文)을 통해 감영에 보고하여 기장의 장정 500명, 양산의 장정 700명, 김해의 장정 800명 그리고 본 동래의 장정 6,800명을 확보하고 부산창의 미곡 70포를 빌린 다음 별도로 감독할 관리를 파견해 주었다. 올해 2월 12일 모라 뒤쪽 방축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무너진 곳을 메우고, 내려앉은 곳을 돋우어 3월 16일에 주례의 사목포(司牧浦)에서 일을 마쳤다.
이렇게 10여 리 7,000발의 둑이 마치 바다를 막은 성처럼 우뚝 서니 물의 피해는 사라지고 그 땅도 다시 열리게 되었다. 우리 부사의 공로는 소식이 두원에 제방을 쌓은 것에 못지않다. 이곳 부민들의 본업도 다시 보리농사라도 지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름답고 성대하다. 이에 돌에다 새겨 영세토록 남기노라. 순정 후 네 번째 임진년[1832] 9월 9일. 원주의 변진화가 기록하고, 영천의 이사훈이 쓰다.
도감 중군 김형진, 별임 최익헌·신성술·박치언, 도색 호장 이중담, 읍비장 김처권·김광수, 서계색 호장 이정출, 읍비장 이시간·방치상·정석훈, 면비장 김국신·김득서·황운종·이상경·강계욱·최대륜·김환정, 김규혁, 겸감 황해록[沙州一面 處洛江下流要衝地 沃壤空閒 越乾隆戊申 新築堤堰 蒙利大矣 甲戌大水 在在潰決 歲患浸塾 民不安堵 無計堤防 何幸我賢侯 特軫民艱食 關白巡營 劃得機張丁五百 梁山丁七百 金海丁八百 本邑丁六千八百 貸下釜倉米七十包 別遣監色 是年二月十二日 肇役于毛羅後防築 塡塞其崩 添築其夷 三月十六日 告工于周禮司牧浦 於是乎千十有餘里七千把堤堰 屹伏若捍海城 其害乃去 厥土復闢 我侯之功 不下蘇堤杜原 斯民之業 復有支麥祥稼 猗歟盛哉 爰志于石 垂于永世云爾 崇禎紀元後四壬辰重九 原州 邊鎭和 識 永川 李思勳 書 都監 中軍 金亨進 別任 崔翼憲 申聖述 朴致彦 都色 戶長 李重倓 邑裨將 金處權 金光秀 書契色 戶長 李廷出 李時幹 房致祥 鄭錫勛 面裨將 金國信 金得瑞 黃雲宗 李祥敬 姜啓煜 崔大崙 金煥鼎 金奎赫 兼監 黃海錄].”
[현황]
보호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 훼손된 부분이 거의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부산광역시에서 소유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박제민 축제혜민비는 19세기 동래 부사로 재직한 박제명의 제방 축조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 주는 금석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