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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942
한자 曺正煥祭壇碑
영어의미역 Altar Monument for Jo Jeonghwan
이칭/별칭 남강 조 선생 제단비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1117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비|제단비
관련인물 조정환(曺正煥)|조규갑
재질 화강암
크기 2m
건립 시기/일시 1969년 3월연표보기 -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조정환 출생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1117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에 있는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정환(曺正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조정환 제단비(曺正煥祭壇碑)는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된 조정환[1875~?]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들인 조규갑이 1963년 제단과 함께 세웠다.

[위치]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1117번지 녹산 분절 마을에 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 재실 녹산 남강재 앞에 있다.

[형태]

비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크기는 높이 2m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남강 조선생 제단비(南岡曹先生祭壇碑)’라고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대한민국이 광복되었을 때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여러 요인들이 모두 즉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남강 조 선생만은 유독 돌아오지 않았다. 물어 보니 선생이 일찍이 만주로 간 뒤로 자취를 찾을 수 없는데, 아마 이미 죽었으리라고 한다. 선생의 중제(仲第)인 해선 선생은 미국에 있었는데, 그가 말하길 ‘어느 해인가 일편단심은 조국의 일월에 붙이고, 백골은 중국의 산천에 묻노라. 이제 인간사를 풀어 놓나니, 오늘 아침이 독립한 날일세’라는 시를 부쳐 온 뒤로 소식이 두절되었지. 이는 아마 형님께서 마지막으로 절필하신 글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감히 이것으로 선생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늘까지 이른바 ‘어느 해’라는 것도 지나간 것이 몇 년이니 선생의 나이가 벌써 95세로 거의 100세에 가깝다. 또 선생께서 아직 살아 있다면, 선생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니 분명 이렇게 소문의 흔적조차 없을 리가 만무하다. 만약 참으로 말 못할 일을 당하였는데도 귀신이 찾아와서 먹을 곳이 없다면, 어떻게 하루라도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공의 아들 규갑이 괴로워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어머니 정 유인의 묘소 가까이에 제단을 설치할 것을 생각하고, 시제를 지낼 때 아울러 그 제단에서 선생의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의논하고 아울러 제단의 비문을 요청하였다.

아! 선생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장으로 자부하여 남쪽에서 명성을 떨쳤었는데, 불행히도 나라를 잃게 되자 결국 해외로 나가 다시 국권을 회복할 일을 도모하는 데 일생을 다 바친 것이다. 이제 조국의 산하가 다시 회복되었건만 그 완성을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니, 세상에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선생을 위해 애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 선생께서 당시에 오직 스스로 자정하시어 나서지 않으셨다면, 한 세대의 유종이 되시어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매우 컸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참으로 선생을 애모하는 것이 지극하여 선생께서 스스로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셨음을 안타까워한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래도 변론할 말이 있다.

대개 은나라의 세 인자가 인을 행하는 것은 같아도 그 행적은 같지 않다. 유자의 행실이 열다섯 가지로서, 유자가 되는 것은 한 가지이지만, 각자 나아가는 것은 하나가 아닌 것이다. 선비가 저 시대에 있어서 자정하는 것으로 처신하면 분명 의를 행하는 데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나라의 존망에는 농부든 기생이든 모두 책무가 있는 법인데, 선비가 유독 몸을 깨끗이 해서 꼿꼿하게 은둔하는 것으로만 나아가 전연 나라를 구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우리나라는 유학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데, 민족의 의거로 가장 뜨거웠던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 때 앞장서 선도한 사람 가운데 유자로 이름을 내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 오로지 파리 장서 사건이 겨우 유자들에 의해 일어났을 뿐이다. 다행히 선생은 교남에서 일어났고, 선생은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호서에서 일어난 것을 의롭게 여겨, 함께 먼 지역에까지 가서 모두 겨레의 대의를 위한 일에 목숨을 다하였다.

이에 유자들도 또한 천하 후세에 이름 지을 바가 없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생께서 우리 유학을 빛내고 후학들에게 은혜를 남긴 것이 실상 지극히 큰 것이다. 하필 가르치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앉아 친히 깨우쳐 준 뒤에야 스승이라고 하겠는가? 벌써 삼가 그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어 시 한 수로 하늘에 계시는 선생의 영혼께 외쳐 본다.

‘삼천 년 강토가 끝나는 이곳, 칠백 리 낙동강이 바다로 흐르는데, 강과 바다의 인후에 옥산이 빼어나서, 천 년 동안 울창히 서려 맑은 기운 감도네. 대인께서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떨어지니, 아름다운 덕 고운 문채 모두 밝게 드러났네. 어릴 적엔 그 명성이 짝할 사람 없더니 자라서는 격렬한 마음 풀고 먼 곳으로 떠돌았네. 여러 호걸들과 힘을 합쳐 함께 머물고 큰일 장차 이루어질 무렵 몸이 쉬었네. 한국과 중국은 같은 땅, 길이 멀어서 청산에 백골 되어 가는 대로 머물렀네. 같은 어머니의 아우도 미주에 머물러 형제간의 지극한 심정 오랫동안 답답했네. 저세상 같이 가면 다시 무엇 근심하랴, 영혼은 못 갈 곳 없으니 우리 땅인들 못 오랴. 같은 무덤에 안 묻혀도 그 언덕에 제단을 만들었네. 원학(猿鶴)의 맹세를 지켜 서로 찾으리니 수많은 사람들 돌아와 다투어 눈 닦고 보리라. 세시 때면 향 피워 경건히 모시어 천 년 또다시 만 년 한정 없으리.’

대한 광복 기유년[1969] 3월 곡우절 한산 후학 안붕언 삼가 짓고 씀.”

[현황]

조정환의 고향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분절 마을은 현재 부산·진해 경제 자유 구역 부지 조성 공사로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오직 공사장 한가운데에 녹산 남강재와 조정환 구국기적비, 조정환 제단비 등만 남아 있는데 진입로가 없어 접근이 어려운 상태이다.

[참고문헌]
  • 『강서구지』(강서구지편찬위원회, 1993)
  • 『부산 금석문』(부산광역시·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2)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http://www.bsgangseo.go.kr)
  • 부산광역시청(http://www.bu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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