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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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剛石 |
영어음역 | Gim Gangseo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가 1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선학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미술 평론가.
[활동 사항]
김강석(金剛石)[1932~1975]은 1932년 일본 도쿄[東京]의 일본교구(日本橋區) 상기정(箱岐町) 2정목(二丁目)에서 태어났다. 1939년 경화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1943년에 군마현(群馬縣) 산전군(山田郡)의 상생국민학교(相生國民學校) 6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44년에 도쿄의 향도구립중학교(向島區立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48년에는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무역과를 다녔다.
김강석은 1959년에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그해 9월 28일 부산의 『민주 신보』에 「창작의 시공간 문제」를 발표하면서 미술 비평을 시작하였다. 1961년 9월 26일 『국제 신문』에 「미술가의 자기 귀화」를 싣고, 「김종식 유화전」[『국제 신문』, 1970. 2. 17]·「이념 없는 부산 미술」[『부산 일보』, 1970. 3. 6]·「1962년 전기의 부산 화단」·「이용길 제2회 판화전 촌평」·「김윤신 조각전을 보고」·「제1화 앙데팡당전을 보고」·「착잡하나 성과 큰 민전」·「추연근 개인전을 보고」·「12월전을 보고」·「1965년 부산 문화계의 측면사」·「성백주 회화전」·「현대 미술의 방향-오늘의 한국 전위 미술을 위하여」[1972] 등 이윤제·이석우(李錫雨)·김동규·임호(林湖)·전준자·추연근·정원일·남영철·서재만 등의 개인전 평과 후기전·혁전·동맥전 등의 그룹전에 대한 비평을 썼다.
1975년 2월에는 『공간』에 「부산 화단의 문제와 그 중요 작가」, 『부산 일보』와 『국제 신문』 등에 70여 편의 비평문을 남겼다. 또한 「국전에 대항하는 민전」[『마산 일보』, 1965. 4. 16]·「국전에의 제언」[『국제 신보』, 1964. 9. 17]·「제6회 국전평」[『경남 매일』, 1967. 10. 10] 등 국전이 나아길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김강석은 미술 비평을 하기 이전에 1957년 『영남 일보』에 「포주 문학 팔지 말라」라는 글을 비롯하여 「통속성의 재고-신문 소설을 비판함」[『대구 매일』, 1957. 10. 14]·「문학과 저항의식」[『영남 일보』, 1959. 5. 29]·「한국 문학과 주체 의식」[『영남 일보』, 1959.5.29]·「문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대구 일보』, 1959. 6. 11] 등 대구에 거주하면서 그곳 신문에 게재된 주요 문학 평론만도 30여 편이 되었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김강석은 1975년 1월 2일 4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대표적인 저서로 『1971년도의 한국의 중요 미술 요람』[1971]·『전위 미술 용어집』[1972]·『석고상의 형태 잡기』[1972]·『미술 용어집』기초 미술 용어편[1972]·『디자인 용어집』기초 용어편[1972]이 있다. 예술론으로 「현대 예술과 한가론(閑暇論)」, 미술 평론으로 「후진 미술의 자율적 참여」·「미술 전통의 계승을 위한 시론」·「현대 미술의 난해성과 지향성」 등 300여 편의 글이 있다. 또한 『부산의 작가 10인』[갤러리 누보 개관 도록, 1987]과 이용길의 『가마골꼴아솜누리』[낙동강보존회, 1993]에 비평이 실렸고, 1960년 이후 『부산 일보』와 『국제 신문』 등에 실린 여러 편의 비평문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5년에 김강석을 추모하는 부산의 화가들이 ‘미술 평론가 김강석씨 유족 돕기’ 운동을 전개하여, 118명이 참여하였고, 44만 8500원을 모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