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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801
한자 梁世珠
영어음역 Yang Sej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2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상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화 예술인
성별
대표경력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 예능 보유자[악사역]
출생 시기/일시 1922년 1월 29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65년 10월 - 동래 야류[상쇠역]로 대통령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1년 4월~1971년 5월 - 탈 개인전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71년 6월연표보기 -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악사역] 예능 보유자로 지정
활동 시기/일시 1971년 5월~1971년 6월 - 동래 야류 창작 가면 전시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72년 - 제13회 전국 민속 경연 대회에서 문공부 장관상[동래 지신밟기 상쇠역]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7년 9월~1987년 12월 - 부산대학교 무용과 강사로 출강
몰년 시기/일시 1988년 1월 8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2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일본
거주|이주지 만주
활동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 부산광역시 동래구지도보기
묘소 백운 묘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 예능 보유자.

[활동 사항]

양세주(梁世珠)[1922~1988]는 1922년에 부산동래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930년 중반까지 매년 전승되던 「동래 야류」를 관람하였으며, 「동래 야류」를 쫓아다니며 꽹과리를 쳤고 동래 지역의 당제 등을 구경하며 전통 예능을 가까이서 접하였다. 10대 후반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철도 공작창에서 공원으로, 만주에서는 선반공으로도 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악극단에 입단하여 유랑 극단을 따라다녔다. 국악 장단에 능숙했던 양세주는 악극단에서 드럼·기타·트럼펫 등의 서양 악기를 배웠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여 악기를 다루는 실력도 출중하여 여러 악기를 섭렵하였다. 양세주는 6·25 전쟁이 휴전된 후 동래 카바레와 부산 온천장 제일 관광 호텔 6인조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양악기로 활동을 했어도 어린 시절부터 배운 국악 장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양세주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어쩔 수 없는 엽전이더라.”라고 『국제 신보』[1972년 2월 2일자] 인터뷰 기사를 통해 말하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표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고백이었다.

40세에 양악기 악단들과 결별하면서 양세주는 우리의 전통 예능에 관심을 다시 불살랐다. 1961년 전통 민속 연구에 참여하여 실제 인물을 찾아 발굴시키는 창립 멤버가 되었고, 1965년에는 동래 종다방 옥상에서 자료를 모으고 연습을 하면서 부산 민속을 재발견하고 중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65년 서독 대통령의 방한 때에 환영 행사에서 상쇠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 6월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악사역]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동래 학춤」의 명인이기도 하여 양세주는 멋들어진 춤으로 일본 니콘 카메라의 월간지 표지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940년대 후반에는 「동래 야류」의 명인인 박덕업(朴德業)으로부터 「동래 야류」의 탈 제작 방법을 전수받아, 1971년 4월과 5월에는 서울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6월에는 부산시 공보관에서 탈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서울 전시회에서는 「고성 오광대」·「하회 별신굿」·「봉산 탈춤」 등의 탈과 함께 전시하였고, 부산 전시회에서는 창작 탈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연(鳶)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연동우회를 조직하여 연 날리기의 국제 교류에도 힘을 쏟은 바 있고, 능통한 일본어 실력에 민속 예능 교류 성과 등을 활용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홍보 사절을 맡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양세주부산전자공업고등학교에서 「동래 야류」를 연수시키는 데도 적극적이었고, 1987년 2학기에는 부산대학교 무용과에서 민속 연희 과목을 강의하였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양세주는 1988년 1월 8일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유족과 수많은 제자, 부산 시장, 문화재 관리 위원, 일본 조의 사절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치러졌다.

양세주는 성품이 온순하고 열정적인 탓에 신명 나는 음악과 춤에 남다른 집중을 보였다. 키 180㎝에 몸무게 65㎏의 커다랗고 마른 몸매를 가진 남자의 몸에서 풍겨지는 춤사위의 풍류와 풍물 장단의 흥겨움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손색이 없었다. 부인 전덕명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으나, 일찍 상처하였다. ‘학은 70%밖에 모이를 먹지 않는다’거나 ‘전통 예술을 빙자하여 빵을 얻는 무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등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였으나, 전통 예능에 몰두한 탓에 가정을 등한시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한 가정을 꾸리는 데 능숙하지 못해 가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자녀들은 양세주의 예술 정신을 이해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들 중 양세주의 예능을 이어가는 사람은 없다. 양세주는 가족과의 대화도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랬던 탓에 ‘자녀에 대한 사랑이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세주의 맏며느리에 따르면 딸을 시집보내던 날에 꽹과리를 치며 눈물 짓던 양세주의 모습에서 자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백운 묘지에 마련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5년 10월에 「동래 야류」[상쇠역]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1971년 6월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악사역]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2년에 제13회 전국 민속 경연 대회에서 문공부 장관상[「동래 지신밟기」 상쇠역]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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