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94
한자 朴仲質
영어음역 Bak Jungjil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대표관직 염장관
거주|이주지 동래현 - 부산광역시
부임|활동지 부산 - 부산광역시지도보기

[정의]

조선 초기 동래현의 염장관이자 동래 지역 역모 사건의 주모자.

[활동 사항]

박중질(朴仲質)은 조선 초기 동래 지역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져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염장관(鹽場官)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염전 담당 관리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염전 이름이나 구체적인 업무는 알 수 없다. 박중질이 가담한 역모 사건에 대해 『태조실록』은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1394년(태조 3) 1월 역모 사건이 발각되었다. 동래 현령(東萊縣令)이었던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 박중질은 1392년(태조 1) 12월 나라의 안위(安危)와 고려 왕씨(高麗王氏)의 명운을 알아보기 위해 밀양에 사는 맹인 점쟁이 이흥무(李興茂)를 찾아가 점을 쳤다. 이 일이 발각되어 조정에서는 이흥무를 잡아들여 문초를 하였다. 이흥무의 자백에 따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고, 가담자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葳), 김가행(金可行), 박중질(朴仲質) 등도 잡혀와 국문을 받았다.

김가행과 박중질박위가 보낸 사람의 말을 듣고 점을 쳤으며, ‘고려 공양왕(恭讓王)의 명운(命運)은 주상 전하[이성계]와 비교하여 누구 나은가, 왕씨 중에서는 누가 명운이 귀한 사람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이흥무는 ‘남평군(南平君) 왕화(王和)의 명운이 귀하고, 그의 아우 영평군(鈴平君) 왕거(王琚)가 다음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박중질은 1393년(태조 2) 봄 동래 객사에서 김가행을 만나 ‘공양왕 아들의 명운이 좋고, 점궤인 복사(卜辭)도 몰래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박중질 등의 자백에 따라 왕화, 왕거를 포함한 고려 왕족 여럿이 불려나와 국문을 받았다. 그 결과 왕화와 왕거는 이미 1392년(태조 1) 9월 삼촌인 승려 석능(釋能)과 함께 이흥무를 찾아가 자신들의 명운과 길흉에 대해 점을 쳤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에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에서는 역모 주모자들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태조는 뛰어난 인재라는 이유로 박위는 복직시키고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는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이후 대간의 재수사 요청으로 1394년(태조 3) 2월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등은 다시 수원부(水原府)로 잡혀가 연루자 사이의 대질 심문과 국문을 받았다. 그 결과 한 달 뒤에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왕화, 왕거는 참수를 당하고, 석능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으며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가 있던 박위는 파직당했다. 또한 고려 왕족이 포함된 역모 사건이었기 때문에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삼척으로 쫓겨나 있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다. 박중질의 역모 사건은 『태조실록』에 수록된 박위의 졸기(卒記)에도 나온다. 이에 따라 태조의 건국 이야기를 서술할 때는 박중질의 역모 사건으로 소개되고, 이는 일제 때 발간된 『개벽』, 『별건곤』 같은 잡지에도 실렸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