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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삼동 조도 당산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12
한자 東三洞朝島堂山祭
영어의미역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 in Dongsam-dong Jodo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와치로147번길 30[동삼3동 225-19]
집필자 김승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 신앙|동제
의례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신당/신체 제당|제단|위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6년 5월 8일 - 원래 조도에 있던 제당을 현 위치로 이전
의례 장소 조도 당산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3동 225-19지도보기

[정의]

부산시광역시 영도구 동삼3동 조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동삼동 조도 당산제는 음력 정월 14일 자정에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3동 225-19번지에 있는 조도 당산에서 마을의 안과태평과 풍어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조도(朝島)는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1776년]에는 조도(鳥島), 『청구요람(靑丘要覽)』[1834년]에는 동백도(冬栢島), 『영남읍지(嶺南邑誌)』[1871]에는 조도(朝島)로 각각 기술되어 있다. 또 개항 후 일본인의 왕래를 위해 발행된 『항한필휴(航韓必携)』에 “동백섬은 주위가 약 10리 반인데 서안(西岸)에 6~7의 인가(人家)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개항 당시인 1876년 무렵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도의 당산은 원래 현재의 한국해양대학교 뒷산 중턱에 있었는데 높이 3m, 넓이 16.5㎡[5평] 정도의 단을 돌로 쌓고, 그 위에 6.6㎡[2평] 가량의 목조 기와 건물을 세우고, 길이 20m 정도의 돌담을 두른 형태였다. 그러나 조도한국해양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조도의 주민들이 동삼3동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도 당산도 1976년 5월 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건립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당의 면적은 17.8㎡[5.4평]이며, 슬래브 지붕에 블록을 쌓아 붉은 타일로 마감하였고, 문은 여닫이 외짝 알루미늄 새시 문이다. 문 왼쪽에 세로로 붙인 나무 현판에 ‘조도당산’이라 쓰여 있다. 제단은 나무판으로 이루어졌으며, 제단 위에는 왼쪽에 ‘조도장군지위(朝島將軍之位)’라 쓴 나무판이 세워져 있다. 중앙에 ‘조도본산산왕대신(朝島本山山王大神)’이라 쓴 위패가 위패함에 들어 있으며, 오른쪽에 ‘조도본산당산지위(朝島本山堂山之位)’라 쓴 나무판이 세워져 있다. 용화사 안의 중앙에 조도 당산에서 모신 화강암의 미륵장군석[밑변 30㎝, 높이 32㎝]을 옮겨 와서 붉은 깔방석 위에 모셔 놓았다.

[절차]

제관은 용화사의 박 보살이 도맡아 계속하고 있다가 2010년에 작고했다. 제사 비용은 조도에서 살다가 동삼3동으로 옮겨온 가정으로부터 추렴하고, 제수는 제의 당일 아침에 자갈치 시장에서 구입하는데, 조리는 용화사 보살들이 한다. 제물의 진설은 앞줄에 대추·밤·배·곶감·사과를 놓고, 다음 줄에 돼지머리를 놓으며, 셋째 줄에 민어구이·조기구이·삶은 군수·삶은 낙지와 도라지·고사리·콩나물·배추 전·팥떡을 놓는다. 그리고 세 위패 앞에 각각 메와 탕[무·홍합·두부를 넣어 끓인 것]을 놓는다.

제의 진행은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린 뒤 참석자 전원이 삼배하고 나면 제관이 마을을 위한 이령수[신(神)에게 말로 읊조리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를 왼다. 그때 참석자들은 각기 자기들의 소원을 비손한다. 제관의 이령수가 끝나면 소지(燒紙)는 하지 않고 제상을 물린 다음 전원이 음복을 하되 일부분을 남겨 동네 어르신이 음복하게 한다.

[부대 행사]

정월 보름날 아침에 동네 어르신[조도에서 이사한 가정의 어른들]을 모시고 제사에 쓴 제물을 음복하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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