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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82
한자 無憂樓
영어의미역 Muu-ru Cas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37번길 2[수안동 236-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루
정면칸수 3칸
건립 시기/일시 1731년연표보기 -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912년경연표보기 - 철거
원소재지 무우루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237번길 2 주변[수안동 236-4]

[정의]

조선 후기 동래 읍성 남문에 있던 문루.

[변천]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이 함락되고 성곽이 점차 쇠락해지자 1731년 당시 동래 부사인 정언섭(鄭彦燮)은 동래 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증축하였다. 조선 전기 읍성의 성곽에 비해 3~4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왜란 당시 남문에서 큰 전투가 있었고 동래 읍성에서 남문이 가지는 중요성과 상징성이 남달랐기 때문에, 남문에 익성(翼城)을 두어 이중문(二重門)으로 쌓았다. 앞문의 이름은 세병문(洗兵門), 뒷문의 이름은 주조문(朱鳥門)이라 명하였다. 주조문에는 이층으로 된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이것이 무우루이다. 무우(無憂) ‘근심을 없앤다’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나도 백성들이 근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1883년부터 동래 온천장에서 일본인의 영업이 시작되고, 1912년경에는 온천장과 주변 야산을 개발하여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공원 조성에는 많은 목재가 필요하였는데, 이를 위해 동래 읍성에 있던 목재들을 가져다 사용하였다. 1907년 도요타 후쿠타로[豊田福太郞]가 지금의 동래 허심청 자리에 봉래관(蓬萊館)이란 여관을 세웠다. 도요타는 1912년 경매에서 동래 읍성의 남문을 낙찰 받아, 그것을 공원 조성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 때 무우루가 없어졌다.

[형태]

무우루는 2층각(層閣)에 3칸 건물이다. 문을 지키기 위해 문장청(門將廳) 2칸, 문지기의 집 3칸을 두었다.

[의의와 평가]

동래 읍성 남문은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 조선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동래가 지켜져야 조선 전체가 안전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동래부를 경주 진관에서 독립시켜 독진(獨鎭)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였고, 해안 지역 역시 조선 최고의 수군 기지가 되었다. 이러한 위상이라도 반영하듯 읍성 남문의 이름을 무우루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성벽과 문루가 가지고 있던 읍치(邑治) 공간 구조의 상징성이 박탈되고 공원 조성 목재로 사용되었다. 무우루의 변화는 동래부의 변화를 알리는 동시에 조선 최후의 보루가 식민의 공간으로 편입되었음을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 현재 동래부 동헌 내 충신당 전시관에는 무우루 등 동래 읍성에 있었던 문루 이름이 적힌 편액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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