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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81
한자 鄭彦燮
영어음역 Jeong Eonseop
이칭/별칭 공리(公理),정지재(定止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131-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
대표관직 동래부사|병조 참판
출생 시기/일시 168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7년 -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25년 - 증광 문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27년 - 사간원 정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사헌부 지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동래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33년연표보기 - 동래부사 퇴임,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48년연표보기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35년연표보기 - 선정비 건립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관련 유적 동래향교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35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공리(公理), 호는 정지재(定止齋). 증조할아버지는 정숙(鄭橚)이고, 할아버지는 정태구(鄭台耈)이며, 아버지는 광주부윤을 지낸 정필동(鄭必東)이다. 어머니는 박번(朴蕃)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언섭(鄭彦燮)[1684~1748]은 1717년(숙종 43)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725년(영조 1)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예조·병조의 낭관(郞官),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1727년(영조 3) 사간원 정언(正言)에 올랐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 과정에서 파직되었다. 정미환국이란 영조(英祖)가 극심한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강경파인 노론을 배제하고 온건파인 소론을 대거 기용한 것을 말한다. 이때 정언섭은 소론인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났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무신란(戊申亂)]이 일어나자 영조정언섭을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발탁하였다.

1730년(영조 6) 11월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무신란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에 영남 지방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5품 관리에게 당상관에 해당하는 동래 부사 벼슬을 준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인사여서 조정 대신들의 반발이 컸다. 『영조실록(英祖實錄)』의 사관(史官)까지도 정언섭의 동래부사 임명 건에 대해 “자급(資級)과 경력이 부족한 자를 임명한 부적절한 인사”라고 평하였다.

정언섭이 부임했을 당시 동래부는 임진왜란을 겪은 지 140여 년이 지났음에도 임란 때 허물어진 성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에 정언섭은 나라의 관문인 동래부 읍성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대대적으로 개축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1731년(영조 7) 정월 동래부 읍성의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월 3일 지반을 측량하고, 1월 24일 개기제(開基祭)를 지낸 뒤 1월 27일 동소(東所)에서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성곽 공사는 동소·서소·남소·북소 넷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4월에 성곽이 완성되고, 6월에는 성문, 7월에는 문루가 완성되어 200여일 만에 튼튼한 성이 만들어졌다. 성곽 공사에는 5만 20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인부는 요역으로 징발한 농민과 승역으로 징발한 승군이 주축을 이루었다. 경비는 쌀 4,500여 섬, 베 1,550필, 돈 1만 3400여 냥이 소요되었다. 이 비용은 중앙의 지원을 받지 않고 모두 정언섭이 마련한 것이었다고 한다.

새로 쌓은 동래부 읍성은 둘레 약 3.8㎞[1만 7291척], 높이 5.1m[17척] 규모에 1,318개의 여장(女墻)을 갖춘 평산성(平山城)의 모습을 지녔다. 여기에 여러 개의 치성(雉城)과 옹성(甕城), 암문(暗門)이 들어섰다. 조선 초기의 읍성에 비해 규모도 커지고 시설도 늘어났다. 성을 완공한 뒤에 수성청(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하여 군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읍성의 유지·보수 규정을 적은 절목(節目)도 마련하였다. 절목의 내용은 동래부 읍성 축조을 위한 노동력 조달 방식, 성향(城餉)의 유지 및 관리, 별군관(別軍官)의 임명과 급료, 문장(門將) 및 문직(門直)의 임명과 급료, 수첩 군관(守堞軍官)의 확보, 군수 물자의 관리 등이다. 동래읍성이 완성되자, 영조는 정언섭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다.

정언섭임진왜란 순절자를 추모하고 기리려는 조정의 시책에도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성 개축 공사 때 옛 성터에서 사망자의 유해를 찾아 거두도록 하였다. 유해는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옛 남문 근처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정언섭은 임지왜란 순절자들의 유해를 모아서 삼성대(三姓臺) 서쪽 기슭[현 내성중학교 부근]에 분묘를 조성하고, 매년 향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심을 얻고, 동래부가 국경 지대임을 상기시켜 적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며, 단결심을 고취시키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정언섭은 문교(文敎)에도 힘을 기울여 시술재라는 재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관사인 연심당을 비롯해 관아 건물들을 중건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1733년(영조 9) 1월 동래부사의 임기를 마쳤다. 2년 뒤인 1735년 정언섭의 공을 기리기 위해 동래향교 안에 흥학문화거사비(興學文化去思碑)가 세워졌다. 정언섭은 충청도 관찰사로 옮긴 후 동부승지, 광주부 윤, 도승지, 한성부 우윤, 병조·호조·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748년(영조 24) 세상을 떴다.

[학문과 저술]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권상하(權尙夏)에게 학문을 배웠다. 1732년(영조 8) 동래 정씨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묘갈명인 ‘유명조선국동래정씨시조고려안일호장부군묘갈(有明朝鮮國東萊鄭氏始祖高麗安逸戶長府君墓碣)’을 지었다. 글씨에도 능하여 동래부사 재임 시 ‘임진전망유해총비(壬辰戰亡遺骸塚碑)’를 썼으며, 1736년(영조 12) 호암당(虎巖堂) 체부(體浮)[1687~1746]의 비명인 ‘호암당대사탑비명(虎巖堂大師塔碑銘)’을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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