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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58
한자 鄭顯德
영어음역 Jeong Hyeondeok
이칭/별칭 우전(愚田),백순(伯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화진김정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초계
대표관직 동래 부사|형조 참판
출생 시기/일시 181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0년 - 증광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62년 - 부사과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70년 - 독진대아문 중수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형조 참판에 임명, 유배
몰년 시기/일시 1883년연표보기 - 사망
특기사항 시기/일시 2002년 - ‘부산을 빛낸 인물’ 목민관 부문에 선정
거주|이주지 용머리 마을, 가오 마을 -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부춘리
부임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활동지 동래읍성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활동 사항]

정현덕(鄭顯德)[1810~1883]의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愚田)이다. 1850년(철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862년(철종 13) 오위 부사과(五衛副司果) 등을 역임하고 고종(高宗) 초에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서형순(徐衡淳)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왔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 후 그의 심복으로서 1867년(고종 4) 동래 부사가 되었다. 그해 9월 임기가 끝났음에도 계속 자리를 지켜 1874년(고종 11) 정월 승지에 임명되어 동래를 떠날 때까지 약 7년 동안 동래 부사를 지냈다.

정현덕은 동래 부사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일본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국교 재개 교섭을 서계(書契)[일본 정부와 주고받던 문서] 문제를 이유로 끝까지 거부하였고, 일본과 밀무역을 하던 박승달(朴承達)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폈다. 동래읍성을 개축하고 관아의 대문인 독진대아문(獨鎭大衛門) 중수, 군사 훈련 등 유사시를 위한 대비도 철저히 하였다.

정현덕은 선정을 베풀어 여러 가지 공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동래의 인심을 바꿔 놓을 정도로 교학을 진흥시켰다. 동래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맹자의 고향]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집집마다 충신, 효자, 열녀가 나오는 가풍을 잇게 하여 순후한 고장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동래 부사에 이어 승지,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흥선 대원군이 임금의 외척인 민씨 일파에 쫓겨나자 정현덕도 파직당해 귀양을 갔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발발과 더불어 대원군이 재집권한 뒤 복귀하여 형조 참판에 올랐다. 얼마 후 대원군이 다시 쫓겨나고 정현덕은 원악도(遠惡島)[사람이 살기 힘든 외딴 섬]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학문과 저술]

동래 부사 재임 중에 동래의 인정과 경치를 노래한 시 「봉래별곡(蓬萊別曲)」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872년(고종 9) 국청사의 승려 명신평윤이 경내에 정현덕 부사 영세 불망비[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산 25-1]를 세웠고,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정현덕 부사 흥학비가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21번지에 남아 있다. 1868년(고종 5) 정현덕의 시를 새긴 태평원 시비(太平園詩碑)[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46]와 금강원 시비(金剛園詩碑)[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0-12 금강 공원]가 세워졌다. 2002년 부산광역시에서 선정한 ‘부산을 빛낸 인물’ 목민관 부문에 뽑혔다

이용자 의견
한** 상훈과 추모 내용은 마치 금강원 시비를 1868년에 정현덕이 세운 것 처럼 서술되어 있다. 수정 요망.
  • 답변
  •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의견 반영하여 문장 수정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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