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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57
한자 宋象賢
영어음역 Song Sanghyeon
이칭/별칭 덕구(德求),천곡(泉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3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제장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여산
대표관직 동래 부사
출생 시기/일시 1551년 1월 8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저작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박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사헌부 지평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15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94년 - 이조 판서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송공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10년 - 청주 충렬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81년 - 좌찬성에 추증,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42년 - 송공단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4년 - 송공사가 충렬사로 바뀜
출생지 청주 - 충청북도 청주시
부임|활동지 동래부 관아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521-46지도보기
묘소|단소 송상현 묘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1
묘소|단소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렬사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5
사당|배향지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1동 838지도보기

[정의]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아버지는 송화 현감 송복흥(宋復興)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활동 사항]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10세 무렵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5세에 승보시(陞補試)[매년 음력 10월 성균관 대사성이 사학의 유생을 모아 12일 동안 시부(詩賦)로 시험을 보던 초시]에 장원을 할 정도로 일찍 문재(文才)를 꽃피웠다. 20세에 소과에 급제하고 6년 후인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1578년(선조 11) 저작, 1579년 박사로 승진하였으며,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 경성 판관을 거쳤다.

1583년(선조 16) 사헌부 지평에 오른 뒤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을 지냈다. 이후 종계변무사 질정관으로 두 차례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북경]에 다녀왔다. 황해도 백천 군수, 충훈부 경력, 군자감 정을 역임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인 1591년(선조 24) 8월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동래에 내려간 송상현은 성심과 신의로 백성을 다스리고 수령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며, 만약 왜적이 쳐들어와 전쟁이 나면 결사보국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동래에 부임한 직후 막역한 친구인 정산 현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보낸 시에 잘 나타나 있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여세를 몰아 같은 날 오후 동래읍성으로 진격하였다. 문신으로서 칼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송상현은 개연히 성과 운명을 같이하겠다고 마음먹고, 병사와 백성을 불러 모아 성을 끝까지 사수하기로 하였다. 적은 동래읍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취병장(聚兵場)[옛 농주산, 지금 동래경찰서 자리]에 군대를 집결시킨 후 100여 명의 군졸을 시켜서 목패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는 글을 써서 남문 밖에 세워 두고 돌아갔다. 송상현은 그 대답으로 목패에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써서 적진에 던졌다. 막강한 적을 눈앞에 두고 결사 항전의 뜻을 밝힌 것이다.

왜군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황령산 밑과 서대로 그리고 취병장에서 일제히 남문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성이 세 겹으로 포위되었으나 송상현은 병사들을 독전하며 하룻밤을 버텼다. 이튿날 새벽 적은 성 뒤쪽 높은 곳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을 난사하고 들어왔다. 적은 동북쪽 성벽을 허물고 난입하여 닥치는 대로 총를 쏘고 칼을 휘두르니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 조방장 홍충관, 교수 노개방(盧蓋邦) 등 많은 사람이 결사 항전을 하다가 죽었다. 무기를 갖추지 못한 백성들은 몽둥이를 들어 적을 향해 내리치고,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벗겨 던지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송상현은 남문에서 독전을 계속하였으나 밀려드는 적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갑옷 위에 조복을 갖춰 입고 호상(胡床)에 꼿꼿이 앉았다. 이때 일찍이 통신사를 따라왔다가 송상현의 인품에 호의를 품게 된 다이라[平調益]라는 왜인이 눈짓으로 몸을 피해 위기를 모면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송상현은 이를 거부하고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여 임금에게 하직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달려드는 왜병들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송상현의 나이는 42세였다.

[묘소]

송상현의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5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94년(선조 27)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605년(선조 38)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송공사(宋公祠)가 건립되었다. 송공사는 1624년(인조 2) 사액(賜額)을 받아 충렬사(忠烈祠)로 이름이 바뀌었다. 1610년(광해군 2)에는 송상현의 고향인 청주에도 충렬사가 세워졌다. 1652년(효종 3) 동래 부사 윤문거(尹文擧)충렬사를 지금의 동래구 안락1동으로 이전하면서 강당과 동재, 서재 등을 증축하여 안락서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부산 충렬사에서는 해마다 5월 25일에 제를 지내고,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는 안락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1681년(숙종 7)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렬(忠烈) 시호를 받았다. 1742년(영조 18) 임진왜란 순절자들을 제향하기 위한 송공단(宋公壇)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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