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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54
한자 閔鼎重
영어음역 Min Jeongjung
이칭/별칭 대수(大受),노봉(老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여흥
대표관직 동래 부사|좌의정
출생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식년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정시 갑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교리, 부수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2년 - 전남도 어사,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교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5년 - 평안도 암행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홍문관 부수찬, 부응교, 부교리, 부응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부수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부사직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2년 - 승지,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경기 우균전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3년 - 대사성, 이조 참의 겸 대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 이조 참판, 대사성, 함경 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7년 - 부제학, 대사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8년 - 부제학, 이조 참판, 대사간, 대사성, 세자시강원 우빈객, 사헌부 대사헌, 호조 판서 겸 대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동지성균, 공조 판서 임명,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70년 - 대사헌, 빈객, 형조 판서, 좌부빈객, 좌참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1년 - 예조 판서, 병조 판서 겸 지경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2년 - 사임함, 대사헌, 판윤, 대사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3년 - 예조 판서, 대사헌에 임명, 유배.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부임|활동지 함흥 감영 -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
유배|이배지 장흥 - 전라남도 장흥군
유배 벽동 - 평안북도 벽동
사당|배향지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사당|배향지 누암서원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사당|배향지 문포서원 - 함경도 문천
사당|배향지 망덕서원 - 함경도 정평
사당|배향지 석실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사당|배향지 구봉서원 - 평안도 벽당
사당|배향지 종산서원 - 함경도 종성
사당|배향지 연곡서원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사당|배향지 운전서원 - 함경북도 함흥
사당|배향지 향사우 - 함경북도 함흥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증조할아버지는 민여건(閔汝健)이고, 할아버지는 경주부 윤 민기(閔機)이며, 아버지는 강원도 감사 민광훈(閔光勳)이다. 어머니는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부인은 신승(申昇)의 딸과 홍처윤(洪處尹)의 딸이다. 형은 민시중(閔蓍重)이고, 동생은 민유중(閔維重)이며, 아들은 민진장(閔鎭長)이다.

[활동 사항]

민정중(閔鼎重)[1628~1692]은 1648년(인조 26) 식년 진사과에 급제하고, 1649년 전시(殿試) 갑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다. 1652년에는 전남도 어사(全南道御使)로 나가 병영과 수영(水營)의 실태를 조사하였고, 호서 암행어사가 되어서는 대동법의 편의 여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1655년(효종 6)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홍문관과 사간원의 요직을 거쳐 1658년(효종 9)에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동래 부사 재임 시 민정중은 왜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누설하는 글을 보낸 사람들을 적발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오위 부사직(五衛副司直)에 임명된 후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승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 참의, 이조 참판을 지냈다. 1664년(현종 5) 함경도 감사로 나갔고 1667년(현종 8) 한양으로 돌아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대사성 등을 거쳐 이듬해 호조 판서가 되었다. 1669년 공조 판서에 이어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거쳐 1672년(현종 13) 병조 판서 재임 시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1674년 숙종(肅宗) 즉위 후 좌참찬을 거쳐 대사헌, 지중추부사, 이조 판서에 올랐다.

1674년(현종 15) 갑인 예송(甲寅禮訟)[인선 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벌인 논쟁]에서 승리한 남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1678년(숙종 4)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뒤 공조 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1681년(숙종 7) 동래 부사 조세환(趙世煥)이 “충렬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함께 배향되어 있는데, 송상현만 판서에 추증되었으니 정발도 추증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조정에서 이 안건을 논의할 때 좌의정이던 민정중은 “정발도 송상현과 똑같이 추증하고 시호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뜻을 이루었다.

1684년(숙종 10)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 판사(判事)로 물러앉아 임금을 보필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의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정쟁을 벌임]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다시 관작을 빼앗기고 변방인 평안도 벽동(碧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92년(숙종 18)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

[학문과 저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저서로 『노봉집(老峯集)』, 『노봉 연중 설화(老峯筵中說話)』, 『임진유문(壬辰遺聞)』이 있다. 글씨는 「우상 이완비(右相李浣碑)」, 「개성부 유수 민심언표(開城府留守閔審言表)」, 개심사 대웅전 편액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1695년 충청도 충주의 누암서원과 함경도 문천의 문포서원에 배향되고, 함경도 정평의 망덕서원에 추배되었다. 1697년(숙종 23)에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에 배향되고, 평안도 벽당의 구봉서원에 입향되었다. 1698년 함경도 종성의 종산서원에 추배되고, 전라도 장흥의 연곡서원에 입향되었다. 1725년(영조 1) 함경도 함흥의 운전서원에 추배되었다. 1726년 함경도 함흥의 향사우에 배향되었다. 1886년(고종 23) 종묘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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