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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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浦 |
영어음역 | Seokp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광석 |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에 있던 조선 시대의 포구.
[개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석포 마을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200여 가구 약 800명이 살고 있다. 이곳의 입향조는 470여 년 전 동래성 수문장을 하던 정복덕이다. 현재 동래 정씨 재실인 석산재에 정복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명칭 유래]
석포(石浦)는 이곳의 하천에 자갈이 많아 ‘돌개’라고 하였는데, 한자로 돌을 가리키는 ‘석(石)’과 포구를 뜻하는 ‘포(浦)’가 합쳐져 생겨났다.
[형성 및 변천]
원래 석포는 천제등(天際登)[현 부산공업고등학교 뒷산]과 전선등(戰船登)[현 부산외국어대학교 뒷산] 사이에 있던 한적한 포구이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폐어선의 잔해가 수상교(水上橋)[동국제강 어귀에 있던 다리] 부근에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비사등(飛蛇登)[부산박물관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이곳에 선착장이 있어 어선들이 왕래하였다고 한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석포는 오늘날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에 위치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석포에 목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서 용호동 입구까지이다.
[관련 기록]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69]에 “석포리에 석포 목장이 있었다. 석포 목장에서는 목마성(牧馬城)을 쌓아 232마리의 말을 방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산천조에 “석포는 동래부에서 남쪽으로 23리에 있고, 목장(牧場)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에도 석포 목장이라는 지명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