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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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穆 |
영어음역 | Jeong M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 335[양정동 464-1]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전기웅 |
[정의]
고려 후기 동래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할아버지는 호장 정지원(鄭之遠)이고, 아버지는 동래의 안일 호장(安逸戶長) 정문도(鄭文道)이다. 부인은 검교 장작감(檢校將作監) 고익공(高益恭)의 딸이다. 아들은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이다. 손자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이다.
[활동 사항]
정목(鄭穆)[1040~1105]은 1072년(문종 26)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076년(문종 30) 군기주부(軍器主簿)에 임명되었고, 현 함경남도 고원군인 고주의 통판(通判)을 역임하였다. 위계정(魏繼廷), 윤관(尹瓘)과 친하여 벗으로 지냈다. 1084년(선종 1) 영천현에 부임하였을 때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현의 서쪽 덕지원에 몇 리가량 불을 놓아 잡초를 태워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수확이 크게 늘어 50여 섬을 군량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이듬해 겨울 요나라의 봉책사가 현 동쪽에 있는 영덕역에서 머물렀는데, 정목이 훌륭하게 접대하여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직사관에 임명되었다.
1093년(선종 10) 감찰 어사가 되었다. 그해 동쪽 지방에 기근이 들자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 고주, 화주, 장평, 영인, 흥원, 현덕, 정주, 변주 등 7개 주의 선무사가 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후 전중 내급사로 금주(金州)의 수령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전중시 어사(殿中侍御史)에 이르렀다. 1097년(숙종 2)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며 형부와 예부의 시랑을 거쳤다. 정목은 녹봉을 받을 때마다 친인척은 물론이고, 마을의 천소까지 나누어 주어 관직을 떠날 때 그동안 나누어 준 곡식이 35석에 이르렀다. 성품이 편안하고 낙천적이며, 덕성을 갖추어 문무백관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온화하고 신실한 태도를 보였다. 또한 모진 행동을 하지 않아 시기하거나 족성(族姓) 간에 이간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묘소]
정목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대덕산에 있다.
[학문과 저술]
『선종실록(宣宗實錄)』을 편찬하여 사고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