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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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熙濟 |
영어음역 | An Huije |
이칭/별칭 | 태약(泰若),백산(白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길 13-1[동광동 3가 1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탐진. 자는 태약(泰若), 호는 백산(白山). 아버지는 안발(安鏺)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활동 사항]
안희제(安熙濟)[1885~1943]는 1885년 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척 형인 안익제(安翼濟)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상경하여 1907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08년 3월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신학문을 통한 자주 독립 사상의 고취가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1908년], 입산리에 창남학교[1907년]를 설립하였다. 부산의 구명학교 설립에도 간여하였으며 2년간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09년 10월경 서상일·김동삼·남형우·박중화·윤세복 등과 영남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된 항일 비밀 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자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최병찬(崔秉瓚)과 『독립 순보』를 간행하기도 하였고 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 민족 지도자들과 국권 회복의 방략을 논의하고 1914년 국내로 돌아왔다.
1914년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취급하면서 해외 독립 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연락망 역할을 하였다. 백산상회는 영남 지역 대지주들의 참여로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성장하였다.
또 1919년 11월경 백산상회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부산부와 인근에 거주한 유지들을 뭉쳐서 해방 운동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한국 청년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유학비와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 부산예월회를 조직하여 민족 자본가들의 결속을 다졌다. 또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발기인으로 각 학교의 설립 및 확장 운동, 교육산업 개선 청원 운동, 조선인 자본가를 위한 특수 금융 기관 설치 운동 등에 진력하는 등 부산 지역의 사회 운동과 민족 자본 육성에 노력하였다.
언론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1920년 봄 『동아 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21년 6월까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장을 지냈다. 동시에 1920년대 부산 지역 민족 운동의 구심체였던 부산청년회를 지원하였고 재무부 간사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최태욱 등과 함께 부산에서 『경제 운동』이라는 잡지의 발간을 시도하였으며 이시목 등과 함께 자력사를 만들어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고 1928년 부산에 협동조합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1928년 1월 자금 압박과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백산무역주식회사가 해산되었다. 이후 안희제는 1929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외 일보』에 출자하여 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였다. 1933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발해의 고도인 둥진청[東京城]에 독립운동 기지로서 발해 농장을 경영하고 이주 한인 300여 호를 정착시켰다. 여기서 자작농을 육성하고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1934년 대종교의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이전해 오자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비롯한 간부들을 대동청년단에 가입시키는 한편 대종교 간부가 되어 서적 간행과 같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일제는 대종교를 독립운동 조직으로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검거에 나서 윤세복 등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안희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지만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43년 8월 3일 중국 무단장[牡丹江] 영제현 영제의원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는 안희제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 4월에 백산상회가 있던 거리를 백산 거리로 지정하였고, 1995년 백산 기념관을 만들어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