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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575
한자 梁漢拿
영어음역 Yang Hanna
이칭/별칭 양귀념(梁貴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사리로 37[괴정동 245]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여성 운동가|사회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부산 YWCA 회장|자매여숙 설립자
출생 시기/일시 1893년 3월 3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3월 - 부산진일신여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7년 - 요코하마신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4년 -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부산여자청년회 회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동래일신여학교 청년회 총무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진명유치원[통영]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한국애국부인회 부위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수도관구경찰청 여자경찰서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부산 YWCA 초대 회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자매여숙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64년 - 장한 어머니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제4회 용신 봉사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68년 - 3·1 운동 선도자 찬하회 감사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6년 - 국민 훈장 동백장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76년 6월 26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학교|수학지 부산진일신여학교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768-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요코하마신학교 - 일본 요코하마
학교|수학지 이화여자전문학교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활동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중국 상하이
활동지 수도관구경찰청 여자경찰서 -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 YWCA -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활동지 자매여숙 -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 245지도보기
묘소 부산진교회 묘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105-2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여성 운동가, 사회 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양덕유(梁德有)이고, 어머니는 한영신(韓永信)이다.

[활동 사항]

양한나(梁漢拿)[1893~1976]는 1893년 3월 3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1남 10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기독교와 근대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근대 학문을 접하며 1913년 부산진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본 왕 즉위를 기념해 떡을 돌리자 먹을 이유가 없다며 학생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신학교[橫濱神學校]에 진학해서도 영친왕 이은의 정략결혼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입법부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 안창호(安昌浩)가 ‘백두산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호적 이름 귀념(貴念)을 한나(漢拿)로 개명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여 YWCA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 운동과 유아 교육에 몰두하였다. 1921년 부산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회장을 역임하면서 여성 야학과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여 여성 계몽과 자각에 힘썼다. 1923년에는 동래일신여학교 청년회 총무로 초기부터 여자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과를 졸업하고, 192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29년에는 초량교회 유년 주일 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통영 진명유치원과 부산 초량 삼일유치원을 운영하였다.

해방 후 우익 계열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된 한인애국부인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설립된 수도관구경찰청 여자경찰서의 초대 서장으로 취임하여 공창 폐지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수도관구경찰청장 장택상과의 불화 등을 이유로 여자경찰서가 폐지되자 부산으로 돌아와 사회 복지 사업과 YWCA 지역 조직을 건설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1946년 부산 YWCA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맥락에서 고아를 돌보는 일을 시작하여 서구 아미동 2가에 오갈 데 없는 고아 55명을 수용하였다. 이는 후일 부산 최초 사회 복지 단체인 자매여숙(姉妹女塾)의 단초가 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면서 늘어난 전쟁고아와 소외 여성들을 손수 거두면서 1952년 정식으로 자매여숙을 설립하고 이듬해 사하구 괴정동 245번지로 이전하였다. 이후 고아원 운영보다 정신 이상 여성들의 재활을 돕는 사업에 집중하였고, 현재 사회복지법인 자매정신요양원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양한나와 관련된 일화는 여러 지면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구 광복동 대로에서 정신 이상자인 금달네라는 여성이 희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양한나가 즉석에서 외투를 벗어 금달네를 감싸 시발택시에 태워 자매여숙으로 데려간 이야기는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또 자매여숙 운영에 필요한 미국 구호 물품을 타기 위해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데굴데굴 뒹굴어 버렸어, 늙은이가 그러는데 안주고 베기나.”라고 할 정도로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을 때 인터뷰에서 “훈장도 고맙지만,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가련한 여성들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라며 병상에서조차 사회사업가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나면 한번 죽는 것이니 구질구질하지 않고 멋지게 살다 가겠다는 것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양한나는 1976년 6월 26일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리 부산진교회 묘역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1964년에 장한 어머니상, 1967년에 제4회 용신 봉사상, 1968년에 3·1운동선도자찬하회 감사장을 받았다. 1976년에 국민 훈장 동백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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