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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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明奎 |
영어음역 | Gim Myeonggy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명규(金明奎)[1893~1977]는 1893년 6월 3일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38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2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에 들어갔다. 김명규는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산의 동래에 와 있으면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으로 동래 장터 3·1 운동을 주도한 엄진영(嚴進永)과 교분을 가졌다. 1919년 3월 초에 동래 지역의 3·1 운동 계획이 진행될 때 김명규는 엄진영과 함께 준비하였고 3월 13일 동래 장터 독립 만세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김명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1920년 12월 28일 김명규는 서울에서 의열단의 핵심 인물인 황상규(黃尙奎)의 밀명을 받고 길림무관학교 설립 기금 조달을 위해 신의주에서 파견된 동지 김노봉(金盧鳳)과 함께 창녕 부호인 하경석(河慶錫)의 집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하경석에게 군자금 3,000원을 요구하였으나 하경석이 응하지 않자 150원을 빼앗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황상규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도중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어, 김명규는 부산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9년 동아일보사 밀양지국 기자와 밀양기자단 이사를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밀양의 부북수리조합과 하남수리조합 이사를 역임하였다. 1956년 삼일절 때 밀양읍장으로부터 독립 유공 표창을 받았다. 1977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