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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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建相 |
영어음역 | Jang Geonsang |
이칭/별칭 | 찬성(贊成),소해(宵海),장명상(張明相)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31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계]
자는 찬성(贊成), 호는 소해(宵海). 아버지는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참봉을 지낸 부유한 지주 장운원(張雲遠)이다. 장운원은 박상진(朴尙鎭) 의사에 의해 살해된 칠곡 갑부 장승원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초대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과 친척이다.
[활동사항]
장건상(張建相)[1882~1974]은 1882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건상의 집안은 장건상이 태어난 이듬해인 1883년 부산진의 좌천 마을[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311번지]로 이사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어린 시절과 독립 운동을 하던 시기에 장명상(張明相)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집 근처의 좌천재(佐川齋)라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지만, 차츰 성장하면서 신학문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던 서당인 육영재(育英齋)와 장로교에서 세운 영어 강습소에서 공부하면서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세에 한 살 아래의 이찬성(李贊成)과 결혼하였으나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경하였다. 1903년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관립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한 후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Gale)[한국 이름 기일(奇一)]의 집으로 옮겨 영어를 배웠다. 러일 전쟁 이후 일제가 노골적으로 조선 침략을 감행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하고,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국에서의 유학의 한계를 통감하고 1907년 2년 만에 부산으로 돌아왔다. 1908년 3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인디애나 발파라이소대학[Valparaiso University]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2년 대학 졸업 후 안창호(安昌浩)로부터 흥사단 활동을 제의받았으나 1916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동제사(同濟社)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 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외무 위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선출되어 외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임시 정부의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상하이를 떠나 1921년 이르크츠쿠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6월에는 베이징에서 국민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정부를 조직하고 외무 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자 대회에서 창조파에 가담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항일 잡지인 『혁명』의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35년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항일 활동을 하던 중 1937년 4월 17일 상하이에서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되어 부산경찰서로 압송된 후 1년 6개월 동안 수감되어 조사를 받다가 기소 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41년 말 부산을 탈출하여 중국 충칭[重慶]으로 가서 민족혁명당 소속으로 194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다시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국무 위원 겸 학무 부장을 지냈다. 1945년 4월 김구(金九)의 밀명을 받고 조선독립동맹이 있던 옌안[延安]으로 가서 김두봉(金枓奉) 등을 만나던 중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12월 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의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장건상은 귀국 이후 여운형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에는 근로인민당을 이끌었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이 나온 후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하였으며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의 입각 제의를 거절한 일로 이승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후 계속해서 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 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며, 공산당원으로 몰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에서 2만 6720표를 득표하여 대한민국 최초 옥중 당선자가 되었다. 제2대 국회에서 최고령자로 임시 의장이 되었으나, 우익 의원들로부터 빨갱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 스스로 의장직을 사퇴하였다.
1956년 진보당결성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지만 조봉암(曺奉巖)과 이견이 생겨 진보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혁신당을 조직하고 통일 운동에 나섰으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구속되어 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칩거해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의 오두막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74년 5월 14일 92세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열렸다. 이데올로기의 터부로 인해 오랫동안 백안시되다가 뒤늦게 독립 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았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6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0년 10월 13일 부산 민주 공원 들머리에 동상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