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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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斗燦 |
영어음역 | Gim Ducha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석만 |
[정의]
부산 지역에 있던 대한조선공사 사장을 지낸 군인이자 기업가.
[활동 사항]
김두찬(金斗燦)은 1919년 1월 24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태어났다. 1938년 평양에 있는 숭실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중퇴를 하였다. 해방 후 군인으로 투신하여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4·3 당시인 1950년 8월30일에는 해병대 정보참모로서 제주경찰국 성산포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통해 예비검속 중인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총살 집행 후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기도 했다. 해병대 상륙사단장 당시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의원, 해병대 부사령관과 사령관을 거쳐 1965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에 김두찬은 곧바로 당시 한국 조선업계 최대 조선소이자 국영 기업이던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 사장에 임명되어, 대한조선공사가 극동해운 사장 남궁연(南宮鍊)에게 불하되어 민영화되는 1968년 11월까지 3년 반 동안 사장을 역임하였다. 대한조선공사는 1937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三菱重工業]의 자본 및 기술로 부산 영도에 건설된 조선중공업주식회사(朝鮮重工業株式會社)가 해방 후 국가에 귀속 기업체로 귀속되어 국영화된 회사이다.
대한조선공사는 1970년대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에서 1,000톤급 이상의 강선(鋼船)을 건조할 수 있는 설비를 가진 유일한 조선소로 사실상의 근대식 조선소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물론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들어와서도 미약한 한국 해운 시장 등의 원인으로 일감이 없어 경영난에 허덕이며 막대한 국자 재정을 축내는 부실 공기업의 대명사였다.
김두찬은 비록 낙하산 인사로 사장이 되었으나 대한조선공사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일감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부에 매달린 결과 1967년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한국 최초의 6,000톤급 선박 건조에 성공하였고, 국제 규격에 맞는 조선소로의 재탄생을 위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끌어들여 시설 확장을 추진하였다. 또 안정적인 일감 확보를 위해 대만이 세계은행 차관을 재원으로 발주한 어선 20척 건조 국제 입찰을 따내는 데 성공했고, 당시 세계 최강의 조선 대국이던 일본 조선업계의 선박 건조 물량의 일부를 하청 생산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김두찬은 이러한 경영 업적을 인정받아 3년의 임기가 끝난 1968년 6월 사장직 연임이 결정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갑작스럽게 대한조선공사가 극동해운의 남궁연에게 불하되면서 퇴임하였다. 군복을 벗고 바로 맡은 국영 기업 사장이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영 정상화 노력은 일정한 성과를 내었고, 1970년대 이후 대한조선공사 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대한조선공사는 1989년 현재의 한진그룹이 남궁연으로부터 인수하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로 존속하며,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부산에서 지역 향토 기업으로서 여전히 압도적 존재감을 갖고 있다. 이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선소를 맡아 경영 정상화를 위해 힘썼던 김두찬의 노력이 일정하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상훈과 추모]
1952년에 은성 을지 무공 훈장과 금성 을지 무공 훈장을 받았으며, 1953년에는 금성 충무 무공 훈장[2회]을, 1954년에는 금성 화랑 무공 훈장[2회]을 받았다. 또한 1956년에는 미국 동성 훈장을, 1959년에는 국방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