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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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時煥 |
영어음역 | Mun Sihw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로 144[복천동 20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계]
아버지는 문정두(文禎斗)이다.
[활동사항]
문시환(文時煥)[1897~1973]은 1897년 8월 12일 경상남도 동래군 남면 밤대[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태어났다. 1남 5녀 중 외아들로 부모의 각별한 사랑 속에 자랐다. 1912년 공립동래보통학교[현 내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립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이 학교 교사였던 김병규(金秉圭)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민족적 의분을 느껴 동명학교 3학년 때 무단가출하여 만주의 안동현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귀국하였다. 외아들의 가출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문시환은 3·1 운동 이후 안희제(安熙濟)를 중심으로 설립한 기미육영회의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20년 4월 전진한(錢鎭漢)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正則学園高等学校]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하고 1922년 조선으로 돌아와 동아일보사 부산지국의 기자가 되었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 대표 회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가하여 노동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 대표 회의에서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고, 국민 대표 회의 후 보천교청년회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의열단은 1923년 12월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와 조선 총독 및 일본 천황 암살의 임무를 수행할 단원 11명을 선발하여 조선과 일본에 파견하였다. 문시환은 이른바 의열단 제3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불린 이 계획을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구여순·강홍렬·김정현·오세덕·배치문·강일 등과 같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1923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출감 이후에도 일제의 요시찰 대상자로 선정되어 해방될 때까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경상남도 동래군수와 경상남도 도훈국장 및 상공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제헌 의회 선거에서 부산 갑구에 이범석(李範奭)이 주도하던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남도지사에 임명되어 1949년 11월까지 재임하였다.
6·25 전쟁 당시 일본 유학 시절 닦은 영어 실력으로 미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특별 고문이 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이후에는 뚜렷한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973년 11월 1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77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