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54 |
---|---|
한자 | 祭石谷堤 |
영어의미역 | Jeseokgok-je |
이칭/별칭 | 제석동 제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43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종봉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저수지.
[개설]
제언(堤堰), 즉 저수지는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축조된 수리 시설이다. 제언의 수는 조선 전기 지리지에 각 군현에 1개 또는 2개 정도이었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 군현마다 5~6개 정도로 늘어났다. 제석곡제(祭石谷堤)[제석동 제언]가 있는 계곡의 이름이 제석골인데, 마을 사람들은 ‘지시골’이라고 불렀으며, 기장 지역에 있는 저수지 가운데 늦게 만들어진 수리 시설이다.
제석곡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나타나지 않고, 19세기 읍지인 『기장읍지(機張邑誌)』에 “제석신방제는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777척이고 깊이가 20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제석동 신축 제언비(帝釋洞新築堤堰碑)[1810]와 제석동 제언비(帝釋洞堤堰碑)[1831]가 새로 조사됨으로써 제언이 축조된 시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제석곡제는 19세기 초인 1810년(순조 10)에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석곡제는 19세기 초 이후 기장군 정관읍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가뭄 해소에 기여하였다.
[명칭 유래]
제석곡제는 골짜기의 명칭인 제석골에서 유래되었다. 제석곡제는 제석천(帝釋天)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곳이 원래 종교적 신앙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형성 및 변천]
제석곡제는 제석동 신축 제언비의 “행현감통정대부이용 …… 가경십오년경오중추시역 신미맹하흘(行縣監通政大夫李溶…嘉慶十五年庚午仲秋始役 辛未孟夏訖)”이라는 기록에 근거하면 가경 15년[순조 10, 1810]에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석동 제언비에 “순조 31년에 비를 세웠다”라는 기록과 비의 왼쪽 면에 병인년[1866, 고종 3] “늦은 겨울에 다시 세웠다”라는 기록을 고려하면, 처음 제언이 만들어진 이후 어느 시점에 보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기장군 정관읍 병산리 쪽으로 가는 길에서 용수리 산막 마을을 지나 다리를 건너 가파른 시멘트 포장로를 따라 500m쯤 올라가면 절이 있고, 그 아래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430번지이다.
[관련 기록]
『기장읍지』[경오식] 산천조에 “제석신방제는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777척이고 깊이가 20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석동 제언 신축비에는 “행현감통정대부이용 좌수 문한겸 제언도감 김효신 좌우편장 이문도 김흥우 유사 한사석 이방 황우신 색리 박치근 송규안 김광필 가경십오년경오중추시역 신미맹하흘 감고 구왕대(行縣監通政大夫李溶 座首 文漢謙 堤堰都監 金孝宸 左右便長 李文道 金興宇 有司 韓思碩 吏房 黃禹臣 色吏 朴致覲 宋奎晏 金光弼 嘉慶十五年庚午仲秋始役 辛未孟夏訖 監考 具旺大)”라고 적혀 있고, 제석동 제언비에는 “가경 15년 경오년 중하에 역을 시작하여 신미년 초여름에 마치다. 도광 11년 신묘년 중춘에 세우다[嘉慶十五年庚午仲夏始役 辛未孟夏訖役 道光十一年辛卯仲春立 立石都監 羅允文]”라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