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숙과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46
한자 橚菓-
영어의미역 Site of Sukgwa
이칭/별칭 숙과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종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념비 터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는 옛 기장현의 복설 기념비를 세웠던 자리.

[개설]

기장현은 1599년(선조 32) 현이 폐지되어, 일부는 동래현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울산군에 이관되어 울산군 하미면(下味面·下尾面)이 되었다. 이후 1617년(광해군 9) 기장현이 다시 설치되면서 동래현에 편입되었던 지역은 환원되었지만, 울산군에 이관되었던 지역은 돌려받지 못하였고, 이 점이 당시 기장현으로서는 주요 현안이었다. 이러한 기장현의 현안을 해결한 인물이 당시 기장 현감 강유후(姜裕後)[1606~1666]였다. 강유후는 1652년(효종 3)에 부임하여 1654년에 이임하였는데, 1653년에 「기장현 환속소(機張縣還屬疏)」를 올렸고, 당시 경상 감사 조계원(趙啓遠)도 동참하여 울산군으로부터 일부를 돌려받았다. 하미면은 1681년(숙종 7) 현민 대표들의 상소로 완전히 기장현으로 복귀되었다.

울산군에 속하였던 하미면은 기장현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기장현은 군현의 영역과 인구가 날로 줄어들어 그들이 부담해야 할 역은 더 무거워졌기 때문에 하미면을 돌려받아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미면 환속이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가 있었던 곳이 바로 숙과 터이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는 “숙과지(橚菓址)는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좌랑 강유후가 본군으로 좌천되었을 때, 상북면·중북면·하북면 3면을 복설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세월이 오래되어 비각은 퇴락하여 비석[片石]만 남아 있는데, 가이 탄식할 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 기장군 향토지』에는 “이곳에 옛날부터 까칠나무라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콩 같은 열매가 맺는 나무라 하여 한자명으로 숙과목이라 하였다. 숙과목은 큰 정자목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이를 숙과정(菽菓亭)이라 불렀다.”라는 숙과 터의 지명 유래가 나와 있다.

[변천]

숙과 터에 대한 기록과 증언은 남아 있지만, 비석을 언제 세웠고 언제 사라졌는지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비석이 없어졌는데, 근처 땅속에 매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숙과정 정자나무도 없애 버렸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당시 이장 이진호가 정자나무 대금 5만 원을 받아서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 표지석 등 어떠한 표시도 없어, 숙과 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위치]

숙과 터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 원당 마을에 위치한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현 통폐합 과정과 군현 주민들의 갈등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