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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423
한자 日光面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1st Movement in Ilgwang-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박영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시위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1일연표보기 - 시위대 강제 해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박영준이 기장면 3·1 운동에 참가하고 와 시위 계획
발생|시작 장소 일광면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 835 일대 도로
종결 장소 일광면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 일대

[정의]

1919년 4월 11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던 3·1 운동이 기장 일대에 전해져 기장 장날인 4월 5일 기장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일광면 이천리에서 망건 제조업을 하던 박영준(朴英俊)기장장에 망건을 팔러 갔다가 시위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 선언서를 품고 돌아온 박영준은 마을 유지와 청년들에게 전국의 3·1 운동의 소식과 기장 지역 3·1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일광면에서의 시위가 계획되었다.

[경과]

박영준이천리의 젊은 청년 10여 명은 4월 11일을 시위 날로 정하였다. 11일 저녁 청년 5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거리로 뛰쳐나왔고 마을 주민들도 이에 호응해 다음날 아침까지 시위가 지속되었다. 때마침 기장에서 시위를 진압하고 있던 일본 군경이 갑작스레 시위대를 급습하여 시위대가 흩어졌으나 박영준만이 끝까지 만세를 불러 체포되었다. 시위대의 강제 해산으로 일광면 3·1 운동은 종식되었다.

[결과]

체포된 박영준은 1919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1919년 6월 28일 대구복심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일광면 3·1 운동은 기장면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났고 3·1 운동 이후 일광면 지역의 항일 의식은 1920년대 청년 운동,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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