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21 |
---|---|
한자 | 淸江橋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at Cheonggang-gyo Brid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청강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비.
[건립 경위]
청강(淸江)은 기장현 읍내면의 유일한 강으로 냇물이 매우 맑아 ‘청강’이라 하였는데, 기장읍의 마을을 골고루 돌아 길게 흘러 장강(長江)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물이 맑아 물속의 돌에 한 점의 이끼도 끼지 않고 하얘 백석청강(白石淸江)이라고도 불렸으며, 용소·덕발·만화의 물이 한데 모여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하여 삼천(三川)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이 설치된 후로 기장읍을 흐르는 청강에는 나무로 된 다리가 놓였지만, 이 다리는 매년 홍수에 떠내려가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1758년(영조 34) 기장읍의 박창휘가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어 세우자고 제안하였고, 읍내의 여러 사람들이 호응하여 드디어 청강교가 건립되었다. 청강교가 완공된 후 이를 기념하여 청강교비(淸江橋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의 기장 현감인 김수한(金受漢)이 썼다.
[위치]
청강교비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92번지에 있다.
[형태]
비석은 몸돌과 받침돌로만 간단하게 이루어져 있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청강교 비문. 현감 김수한. 대개 사물이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법이고, 때도 또한 마땅한 사람을 만나야 마련되는 법이니, 때와 사람이 서로 만난 뒤에야 사물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기장현이 설치된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하천에 다리를 고치는 일이 고질적인 폐단이다. 매해 다리가 무너진 것을 수리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일에 뜻을 두고 돌다리를 만들자고 하였지만, 사물이 적당한 때를 만나지 못하였고, 때 역시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누구도 소매를 걷고 나서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박창휘가 이 일을 개탄하여 모금하고 권면하며 선도하여 큰일을 시작하였고, 송세흥이 재산을 내어 이 일을 도와 그 업적을 마치게 되었다. 위대하도다! 이 일을 이루다니! 그렇다. 때가 이 다리를 이루고자 하니, 이 두 사람이 그 모습을 완성시킨 것이로다. 나는 그 공로를 찬양하고 그 일을 찬미하며 이 다리가 자랑스러워, 공로가 있는 사람들과 재산을 희사한 사람들을 기록하여 다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귀감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도록 드러내고자 한다. 다리가 자랑스러운지 아름다운지는 다 기록하지 않지만, 그것은 이미 여러 사람들의 이목에 전파되어 있다[淸江橋碑文 縣監金公受漢 夫物 有待時而後成 時亦待人而後作 時與人相合而後物成其形 盖機縣之設 其來已久 川橋之役 其弊固矣 每年修壞之際 衆皆有志於此 欲成石橋之功 而物不得其時 時不得其人 人莫扼腕 今者朴昌輝慨然於斯 募勸善導以始大功 宋世興輸財補役 以終其勳 大哉功之成也 噫 時將欲成此物而後 此二人以成其形也 予讚其功美其事壯其物 書有功之員 鑑來往之耳目 表千年之不朽 橋之壯不壯美不美 不記不錄 而播在衆覽焉]”라고 적혀 있다.
비석의 뒷면에는 “대시주 가선 송세흥 건륭 23년 무인년 3월 일, 좌수 김창회, 이방 장석주, 시주 김찬중·송필삼·송세덕, 승(僧) 유간·김검동·이섬돌, 도감 김연흥, 색리 이순빈, 별좌 박선작, 동서동수(東西洞首) 윤흥창·김덕윤, 화주(化主) 박창휘·정두삼[大施主 嘉善 宋世興 乾隆二十三年戊寅三月日 座首 金昌淮 吏房 張碩柱 施主 金贊重 宋弼三 宋世德 僧 有侃 金檢東 李暹突 都監 金淵興 色吏 李純彬 別座 朴善作 東西洞首 尹興昌 金德潤 化主 朴昌輝 鄭斗三]”이라고 적혀 있다.
[현황]
청강교비는 거의 훼손된 부분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청강교비는 1758년에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어 세우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 줌으로써 청강교 자체뿐만 아니라 당시 기장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주도층까지 알게 해 주는 금석문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