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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187
한자 明月寺-
영어의미역 Site of Myeongwalsa Temple
이칭/별칭 명월사지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498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백승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절터
소유자 흥국사
관리자 흥국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 문화 유적 학술 조사를 실시할 때 보고함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 부산광역시·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지표 조사를 실시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현 흥국사 중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3년 1월연표보기 - 금동여래입상 출토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 산 498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168-6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사동에 있는 삼국 시대 가야의 절터.

[개설]

명월사(明月寺)는 수로왕(首露王)이 도읍을 정한 뒤 국호를 가락(駕洛)이라 하고 바다에서 오는 허 왕후(許王后)를 맞이하여 첫날밤을 보냈다고 전하는 곳이다. 수로왕은 이후에 허 왕후와 첫날밤을 보낸 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명월산이라고 이름을 짓고, 신국사(新國寺)·진국사(鎭國寺)·흥국사(興國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명월사는 이 가운데 흥국사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명월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흥국사는 1942년에 중건한 것이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해도 호부 조’에 따르면 명월사는 명월산에 있다고 전하는데, 명월사 사적비(明月寺事蹟碑)에는 명월산이 김해부 남쪽 40여 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사적비는 1708년(숙종 34) 승려 증원(證元)이 찬한 것이데, 수로왕허 왕후의 혼인 전승뿐만 아니라 명월사의 내력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로왕은 한나라 건무(建武) 18년(42)에 분성(盆城)에 도읍을 세운 뒤 국호를 가락이라 하고 바다에서 오는 왕비를 이곳 명월산에서 맞이하였다. 다음날 가마를 함께 타고 궁전으로 돌아오다가 왕후가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 삼아 산신령에게 예물을 드렸다. 왕도 그 신령함에 감동하여 산 이름을 ‘명월산(明月山)’이라 하였다. 뒤에 세 절을 지어 흥국사(興國寺), 진국사(鎭國寺), 신국사(新國寺)라 하여 ‘국’ 자를 썼으니, 영원히 나라의 융성을 비는 장소가 되었다. 신국사는 세자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산 서쪽 언덕에 있다. 진국사는 왕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동쪽 골짜기에 있다. 흥국사는 왕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산 중앙에 있으니 곧 이 절이다. 지금은 ‘삼원당(三願堂)’이라 칭한다. 두 절은 터만 남았다. 산 아래에 부인당(夫人塘)과 옥포가 있다. 왕후는 서역국[인도]의 왕녀로서 바다를 저어 왔고 여기에 배를 매었으므로 저절로 기이한 행적이 많았으나 지금 생략한다.”

명월사는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의 역사에는 전하지 않는데, 명월사 사적비에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던 것을 광해군 10년(1618)에 중건하였다. 그 뒤 다시 중수할 때 무너진 담장 아래에서 명기(銘記)가 새겨진 기왓장이 출토되었는데, ‘건강 원년 갑신 삼월 남색(建康元年甲申三月藍色)’ 등의 글자와 장유 화상(長遊和尙)이 서역국으로부터 불법을 받들어 왔으니 수로왕이 불교를 숭상했음을 증험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건강 원년’은 144년(수로왕 103)인데, 이때 장유 화상에 의해 서역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명월사는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폐사되었는데, 김삼두(金三斗)가 옛 터를 되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였고, 현재 흥국사는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흥국사 경내에는 가락국 태조 왕영후 유적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蹟碑)명월사 사적비가 오랜 풍상을 견디며 서 있다.

[위치]

명월사 터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국도 69호선에서 부산신항으로 가다가 부산 지방 과학 산업 단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가다가 지사동 생곡 마을[명동앞들]로 좌회전하면 다다르는 절골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명월사 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1992년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 문화 유적 학술 조사를 실시하여 이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2006년 부산광역시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부산광역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할 때 이곳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흥국사의 칠성각을 건립할 때 간지가 새겨진 기왓장과 화강암제의 석탑 면석(石塔面石)이 출토되었다. 석탑 면석은 명월사 사왕석(蛇王石)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조각 수법이 꽤 우수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석탑 면석 중앙에는 석불 좌상, 그 양쪽에는 뱀 한 마리가 각각 양각되어 있는데, 삼매경에 빠진 불타를 한 마리의 뱀이 싸안고 있는 형상이다. 인도 야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린디아’라고 하는 사왕(蛇王)과 같으며, 이 사왕이 열반 속에 잠겨 있는 불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 근거로 가락국과 인도 아유타국의 문화 교류라든지 북방 불교에 앞서 남방 불교의 유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1983년 1월에는 금동여래입상 1구가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현황]

흥국사 주변 일대가 옛날의 명월사 터였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흥국사 경내를 제외한 주변 지역은 모두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지표에는 초석으로 생각되는 많은 돌들이 그대로 방치되는 등 계속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의의와 평가]

명월사 사적비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명월사는 가락국 건국 초기에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 불교의 기원이 가락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방 불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옛 가야 지역에는 명월사 외에도 신어산 은하사·불모산 장유암·삼랑진 만어사·하동 칠불암 등 여러 사찰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후대의 설화로, 이른 시기의 가야 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짓기는 어렵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 따르면 수로왕허 왕후를 맞이한 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가락국에서는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지 않았고, 파사석탑도 풍랑을 일으키는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싣고 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452년 가락국 제8대인 질지왕(銍知王)이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복을 빌고 풍랑이 잠들도록 신령께 빌면서 왜적까지 막았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 근거해 보면 허 왕후의 도래와 파사석탑은 불교의 전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가야의 불교 전래가 신라보다 빨랐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가락국 불교는 452년 왕후사(王后寺) 창건을 전후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김해 명월사 사적비의 기록과 출토 유물을 근거로 남방 불교의 전래와 가락국과 인도 아유타국의 문화 교류를 연결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자료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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