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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178
한자 許炳
영어음역 Heo B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대사 마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경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김해 2차 3·1 운동 주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30일 -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연표보기 - 김해 2차 3·1 운동
거주|이주지 대사 마을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활동지 김해 장터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허병(許炳)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대사 마을 사람이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대사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3월 29일과 30일에 일어난 김해 3·1 운동 소식을 접한 뒤 조카 허종식과 더불어 만세 시위를 계속할 것을 꾀하였다.

허병은 같은 동네의 최덕관(崔德瓘), 활천면의 최계우(崔桂禹)[마마리 거주]·조병중(曺秉重)[삼방리 거주], 부원동의 김석암(金石岩), 진례면의 송세탁(宋世卓)·송세희(宋世禧)[일명 송상진(宋相振)] 등과 함께 4월 2일을 기하여 김해의 2차 3·1 운동을 단행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어 자신의 집에서 나무판자에 태극기를 새기고 광목에 수십 매의 태극기를 찍어 만들었다.

4월 2일의 김해 장날에 장꾼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4시경 허병과 주동자들은 시장 내의 십자로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싸전[쌀가게]에서 고기전[식육점]으로 내달렸다. 여기에 군중 약 60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허병은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이때 허병은 함께 거사를 주동한 조카 허종식을 재빨리 피신시키고 총책임을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여 허종식을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1919년 5월 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선고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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