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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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駐韓美軍 |
영어의미역 | U.S. Troops Stationed in South Korea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미군정기와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을 비롯한 대한민국에 주둔한 미국 군인.
[미군정기]
미군이 한국에 처음 진주한 것은 1945년 9월 8일이었다.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 소속 미군 제7사단이 1진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부산에는 9월 16일 미군 ‘선견대’의 진주를 시작으로 9월 25일에 미군 제40사단 주력 부대가 도착하였다. 부산에 진주한 미군은 서면의 경마장[현 하야리아 부대 터]을 중심으로 각 학교 건물,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등에 주둔하였다. 미군은 부산과 경상남도에 1945년 9월에 시작하여 11월까지 진주를 완료하였다. 1945년 11월말 현재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약 7만 명이었다. 정부 수립 후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1949년 6월 29일까지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키고 철수를 완료하였다.
[6·25 전쟁기]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부산에는 1950년 7월 6일 한·미 합동으로 해군방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950년 7월 9일 대구에 주한 미8군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8군 사령관은 전쟁 중에는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중장이었고, 1953년에는 맥스웰 테일러(Maxwell Davenport Taylor) 대장이 부임하여 종전을 주도하였다. 미국은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휴전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1953년 10월 1일 미군의 한국 주둔과 평화 안전의 유지와 집단적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미군은 6·25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에 합법적으로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6·25 전쟁 후 약 7만 명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였다. 1969년의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6월 제7사단 2만 명의 병력이 철수하였다.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대통령은 1977년 9월 1,000명, 1978년 11월 500명을 철수시켰다. 이와 함께 그해 11월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되어 한국군 장성이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현황과 쟁점]
2009년 10월 현재 주한미군의 병력은 2만 8500명이다. 2011년 현재 부산에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다. 56년 동안 미군이 주둔했던 하야리아 기지는 2006년 8월에 폐쇄되었다. 이어 2010년 1월 28일에 하야리아 부대 터의 관리권이 완전히 우리 정부와 부산광역시에 반환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으로 냉전 시대의 논리가 무력해지자 미군 철수론과 감축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1993년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군의 감축과 철수 논의는 약화되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 회담 이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가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고, 안팎으로 강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부평과 경상북도 칠곡의 미군 기지 오염 문제, 부산 군수품 재활용 센터[DRMO] 시설의 환경 오염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고,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시민들과 정부·군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