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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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一八民主化運動 |
영어의미역 | May 18th Democratization Movement|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
이칭/별칭 | 광주 항쟁,5·18,5·18 항쟁,5·18 민중 항쟁,5·18 민주 항쟁,광주 사태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성환 |
성격 | 민주화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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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단체 | 노재열|김영|신종권|김재규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80년 5월 21일 경 - 신종권 등 시위 준비 중 체포 |
종결 시기/일시 | 1980년 5월 27일 - 계엄군의 도청 장악 |
발단 시기/일시 | 1980년 5월 18일 -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의 충돌 발생 |
전개 시기/일시 | 1980년 5월 25일 경 - 김재규 등이 부산에서 유인물 살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5월 17일 - 예비 검속 단행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5월 19일 - 노재열 등이 부산에서 유인물 살포 |
발생|시작 장소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
종결 장소 | 전라남도청 - 전라남도 광주시 |
[정의]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부산 지역 민주 세력의 활동.
[역사적 배경]
1979년 10·26 정변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된 후 조성된 권력의 공백을 틈타 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쿠데타를 시작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학생 시민 10만여 명이 1980년 5월 15일 서울에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정지시키는 한편 집회와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저항하여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 일원에서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의 대규모 항쟁이 발생하였다. 잔인한 진압과 시민에 발포하는 공수부대에 대응하여 시위대는 시민군을 조직하고 폭력에 맞섰으나, 5월 27일 자정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계엄군에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은 시위대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경과]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군사 쿠데타를 감행함과 동시에 가장 큰 저항 세력인 민주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전국적인 예비 검속을 실시하였다. 이에 부산에서도 수십 명이 예비 검속으로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이에 5월 19일 하오 7시경 부산대학교 학생 노재열, 김영 등은 시내 부산직할시 중구 광복동에서 계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 500여 장을 살포하였다. 당초에는 학생들을 선두로 한 가두시위를 계획하였으나, 경찰과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로 가두시위는 실패로 돌아가고 유인물을 살포하는 데 그쳤다. 이 일로 김영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노재열은 피신하였다가 나중에 검거되었다.
부산에서 5·18 항쟁의 진상과 광주 학살의 참극을 알리기 위한 민주 운동 세력의 움직임은 5월 21일 경에 시작되었다. 당시 영남상업고등학교[현 부산정보고등학교] 교사였던 신종권 등 동아대학교의 학생 운동 그룹은 5·18 항쟁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시위를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계엄 당국에 탐지되었고, 전원이 검거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5월 25일 경 김재규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활동가 그룹은 마침내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5·18 항쟁을 보도한 외국 잡지를 통해 항쟁의 진상을 접하게 되자, 관련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제작하여 부산 시민에게 알리기 위한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유인물에는 훗날 5·18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학살당한 부친의 영정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표지에 실었다.
[결과]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부산 지역의 투쟁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며, 유인물의 배포 작업도 소그룹에 국한되었다. 그럼에도 신군부의 쿠데타에 대한 이들의 저항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5월 19일 유인물을 배포한 노재열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김영은 선고 유예 후 강제 징집되었다. 다행히 김재규 그룹은 검거를 피해 발각되지 않았으나, 신종권은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외에 70명 이상이 예비 검속으로 구금되어 곤욕을 치렀다.
[의의와 평가]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부산 지역에서 소그룹 단위로나마 신군부에 저항하는 투쟁이 전개되었고,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투쟁이 감행되었다. 이는 5·18 민주화 운동의 대의를 부산 지역의 민주 세력이 함께 한 것으로, 이후 반독재 투쟁의 전국적 연대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