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조수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007
한자 趙秀元
영어음역 Jo Suwon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여락송정로 363[송정리 5]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차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열사
성별
대표경력 대우정밀 노동조합 편집부장
출생 시기/일시 1967년 10월 10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86년 3월 1일 - 연무대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86년 1월 22일 - 대우정밀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89년 - 대우정밀 노동조합 편집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1년 6월 18일 - 대우정밀 해고
활동 시기/일시 1991년 8월 22일 - 부당 징집 거부
활동 시기/일시 1991년 8월 - 강제 징집 철폐를 위한 영남지역 공동대책위원회 구성
활동 시기/일시 1993년 9월 11일 - 전국해고노동자대회 참가, 삭발 단식 투쟁
활동 시기/일시 1994년 2월 -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선전국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5년 4월 24일 - 병역법 시행령을 위한 국회 청원 제출
몰년 시기/일시 1995년 12월 15일연표보기 - 항의의 표시로 자결
추모 시기/일시 1996년 12월 - 조수원추모사업회 주최로 추모 행사
출생지 강원도 태백시
거주|이주지 충청남도 보령군
학교|수학지 연무대기계공업고등학교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활동지 대우정밀(주)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송정리 5지도보기
묘소 솥발산 공원묘원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

[정의]

부산 지역에 있는 대우정밀 노동자로 병역 특례법 개정을 이끌어 낸 노동 열사.

[활동 사항]

1. 대우정밀에 입사

조수원(趙秀元)은 1967년 10월 10일 강원도 태백시의 탄광촌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탄광을 옮기면서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사했고, 중학생 때 아버지가 진폐증으로 탄광을 그만 두자 생활고가 시작되었다. 조수원은 가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에 있는 연무대기계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밤낮없이 공부에 전념하여 기술 자격증을 땄다.

조수원은 졸업을 앞두고 군 입대가 확실시되자 가족의 생계와 취업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하여 방위 산업체인 부산의 대우정밀에 병역 특례로 입사하였다. 1986년 1월 조수원은 대우정밀에 들어갔지만 작업장은 저임금에 폭력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었던 조수원은 8시간 근무제를 요청했지만, 회사는 시말서와 사직서를 강요하며 야간 근무를 요구하였다. 결국 조수원은 회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수원의 인생에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은 7~8월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부산은 6월 민주 항쟁이 특히 격렬했던 지역으로, 6월 17일 무렵부터 노동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6월 민주 항쟁이 정점에 이른 18일 시위에는 사상 일대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조수원이 근무하던 대우정밀은 부산의 외곽인 기장군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6월 민주 항쟁의 영향을 비껴 갈 수 없었다. 이윽고 8월 13일 대우정밀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대우정밀은 많은 부분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임금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부당한 처우나 강요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면서, 회사 관리자와 노동자의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이런 가운데 조수원은 노동조합 편집부에서 차장에 이어 부장으로 1990년까지 월간지 『해방터』와 주간지 『활화산』을 발행하고, ‘등불’이라는 선봉대 활동에도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대우정밀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을 가지고 신명나고 즐겁게 열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긍심과 신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91년 조수원은 병역 특례 기간 5년 가운데 6개월가량을 남겨 두고 회사로부터 6월 18일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2. 병역특례자 해고 문제 제기

1990년부터 부산 지역 민주 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1월 22일 출범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의 지도 아래 갖가지 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대우정밀은 1991년 상반기 부산 지역에서 가장 치열한 투쟁을 펼친 사업장이었다. 이에 대우정밀 회사 측은 노동조합의 중심 대오를 형성하고 있던 병역 특례자들을 제물로 삼아 노사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이들을 대량 해고하였던 것이다.

병역 특례 제도란 군 복무를 방위 산업체 근무로 대신하는 제도인데, 1993년 이전에는 의무 복무 기간이 5년이었다. 이 5년 동안 해당 근무처에서 해고되면 근무 기간에 관계없이 곧바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 때문에 병역 특례자들은 회사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회사에서 해고된 병력 특례자들은 모두 입영 통보를 받았으며, 조수원도 8월 22일자로 입영 통보를 받았다.

이에 조수원을 비롯한 대우정밀 병력 특례 해고 노동자들은 1991년 7월 15일 대학생 40여 명과 함께 서울의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하며 병무청을 항의 방문하고 국민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8월 초에 해고 무효 확인 소송과 입영 정지 가처분 신청을 부산고등법원에 제기하였지만 이는 기각되었다. 이로써 한국 사회에서 병역 특례자 문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 기나긴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조수원은 그 중심에서 수배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1991년 8월 부산대학교에 임시 상황실을 설치하는 한편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약칭 부산노련] 등 노동 단체와 함께 ‘강제 징집 철폐를 위한 영남 지역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해고자 복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복직의 길은 험난했고, 구속되거나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입영하는 동료들이 생겨났다. 이에 조수원을 비롯한 대우정밀 노동자들은 1993년 9월 11일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약칭 전해투]가 주최하는 제4차 전국 해고 노동자 대회에 참가하여 장장 38일을 넘기는 처절한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94년 2월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선전국장이 된 조수원은 복직 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눈물겨운 노력 끝에 드디어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994년 11월 각계 인사 505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국회와 병무청에 보내고 1995년 4월 24일 병역법 시행령을 위한 국회 청원을 제출하는 등의 활동으로, 1995년 5월 15일 대우그룹으로부터 복직 합의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무청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12월 국회 국방위원회의 노사 합의 권고에도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사회 각계의 지원과 권고에도 끄떡하지 않는 병무 행정 당국의 결정 앞에 조수원은 절망하였다. 인간답게 살고자 했을 뿐 그 누구를 해치는 것도, 공익을 손상시키는 것도 아닌, 그저 신명나는 노동 환경을 만들고자 했을 뿐인 그의 노력이 중죄가 되는 현실 앞에 조수원은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수원은 1995년 12월 15일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빌딩의 계단 난간에 목을 매어 생을 마감하였다. 수배를 받아 도피를 시작한 지 4년 5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조수원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이 죽음으로 병역 특례자의 해고 문제가 가진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었고, 병역 악법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또한 병역특례 해고자들에 대한 수배 해제를 이끌어 내면서 대우정밀 병역 특례 해고자들이 복직되는 결과를 낳았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번지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수원추모사업회 주최로 1995년 이후 매년 12월에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1996년 추모 자료집 『그 산맥에 우뚝 서라』[1996. 3. 15]를 발간하였다. 2012년 현재 조수원의 민주화 운동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위한 심의가 진행 중에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