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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85
한자 朴昌洙
영어음역 Bak Changsu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일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노동 열사
성별
대표경력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958년 7월 28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79년 -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81년 - 대한조선공사 훈련원 입소
1981년 10월 - 대한조선공사 배관공으로 입사
활동 시기/일시 1987년 9월 - 대한조선공사 노조 회계 감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0년 7월 - 대한조선공사 노조위원장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90년 - 부산지역 노동조합총연합 부의장 겸 전국노동자협의회 중앙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91년 2월 - 대우조선 파업 논의로 서울구치소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91년 5월 4일 - 서울구치소 내에서 부상, 안양병원 입원
몰년 시기/일시 1991년 5월 6일연표보기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0년 12월 28일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상 규명 진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6월 24일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결정
출생지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부산 기계공업고등학교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산114-1번지지도보기
활동지 한진중공업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29지도보기
활동지 부산지역 노동조합총연합 - 부산광역시
묘소 솥발산 공원묘원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

[정의]

부산 출신으로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의문사한 노동 운동가.

[활동 사항]

1. 대한조선공사 노조 민주화

박창수(朴昌洙)는 1958년 7월 28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979년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훈련원을 거쳐, 같은 해 10월 대한조선공사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이곳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1963년이었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기 이전까지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은 어용 집행부의 주도 아래 투쟁 없는 사업장으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여름에는 55도에 육박하는 탱크 안에서, 겨울에는 영하 10도에 이르는 얼음 철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대한조선공사의 작업 환경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때때로 발생하는 감전 또는 추락사에 대한 회사 측의 대응은 미온적이었으며, 여름이면 불어터진 국수에 겨울이면 살얼음이 덮인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인간다운 대우를 바라는 대한조선공사 노동자의 불만은 점차 임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드디어 1986년 8월 대한조선공사에서는 차가운 도시락 지급에 반대하는 ‘도시락 거부 투쟁’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때 박창수는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여 부당함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식당을 지어 주기로 약속하면서 파업은 마무리되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박창수는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대한조선공사 현장에서는 어용 노조를 혁파하고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특히 회사 측이 노동조합 대의원 김진숙, 이정식, 박영제를 부당 해고하면서 민주 노조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김진숙은 박창수와 한진중공업 훈련원 동기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한조선공사에서 어용 노조가 유지되는 것은 ‘노조 위원장 간접 선거 제도’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노조 위원장 직선제 관철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7월 25일 대한조선공사에서도 노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파업 투쟁이 폭발하였다. 이때 박창수는 현장 대표로 뽑혀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 9월 15일 마침내 위원장 직선제 선거가 단행되고, 새로 선출된 집행부에서 박창수는 3년 동안 회계 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 7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노조원들을 중심으로 백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도시락 거부 투쟁’ 이후 발족된 ‘노조정상화추진위원회’가 ‘7·25 투쟁’을 거치며 ‘7·25 동지회’, ‘상록회’를 거쳐 ‘백두회’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1989년 5월 28일 대한조선공사는 한진그룹에 인수되어 1990년 7월 회사명이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회사 내에서 활발하게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박창수는 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제14대 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었는데, 94%라는 한진중공업 노조 역사상 최다 득표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2. 전노협과 부노련의 연대 활동

노조 위원장이 된 박창수는 단위 사업장만의 노조 활동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1990년 1월 22일 서울에서 출범한 ‘전국노동자협의회’[약칭 전노협]에 가입하고 중앙위원이 되는 한편 ‘부산지역 노동조합총연합’[약칭 부노련]의 부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제 한진중공업 노조는 조합원만 2천 명이 넘는, 전국노동자협의회 가입 사업장 중 최대 규모의 사업장이고, 부산지역 노동조합총연합의 간판 노동조합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아울러 한진중공업 노조는 1990년 12월 9일 발족한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약칭 연대회의]에 참여하였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노동 정책에 맞서기 위해 전국 16개 대기업 사업장의 노조가 연합하여 결성한 것이다. 이때 한진중공업 노조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약칭 한국노총]을 탈퇴하였다.

1991년 2월 6일 대우조선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긴급 모임을 소집하였다. 박창수는 여기에 참여했다가 제3자 개입 금지와 집시법 위반으로 2월 10일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상태에서 박창수는 전국노동자협의회 및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의 탈퇴 선언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런데 5월 4일 박창수는 서울구치소에서 이마에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고, 이틀 후인 5월 6일 안양병원 1층 콘크리트 바닥에서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3. 의문의 죽음

박창수의 죽음에 대해 수원지방검찰청 강력부는 노동 운동에 대한 회의와 수감 생활에 대한 기피로 인한 비관 자살이라고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찰은 병원에 경찰관 기동대[일명 백골단]을 투입해 영안실의 벽을 부수고 유가족에게서 시신을 강제로 탈취하였다. 그리고 강제 부검을 실시하고 부검 결과도 발표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사건 직후부터 자살을 부정하고 공권력에 의한 살해를 주장해 오던 유족들은 2000년 12월 28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의 진상 규명을 진정하였다. 이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차에 걸친 진상 규명 조사를 펼쳤으나, 진상 규명 불능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즉,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에 의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겠으나, 사망 현장에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행인’이 확인되지 않아 현재로선 자살이나 타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에 대한 영도경찰서 경찰관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의 노동 운동 방해 행위는 ‘노동쟁의조정법’과 ‘형법’ 및 구 ‘국가안전기획부법’의 위반 소지가 있다고 결정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번지의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에 추모비가 조성되었으며, 1992년 2월에 박창수열사추모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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