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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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頭山公園大火災 |
영어의미역 | Big fire at Yongdusan Par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35-18[광복동 2가 1-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1954년 12월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 주변의 판잣집을 전부 태운 두 건의 화재 사고.
[역사적 배경]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유입된 피난민은 약 100만 명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조성된 부산의 도시 기반 시설은 30만 명 거주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피난민 증가에 따른 주택, 상수도, 전기 등의 부족이 극심하였다. 특히 주거 공간 부족은 피난민들로 하여금 부산 시내의 공지에 판잣집을 만들어 살도록 하였다.
부두와 시장이 가까운 용두산에는 판잣집들로 가득하였다. 판잣집의 재료는 합판이나 종이 박스였다. 피난민은 연료로 구공탄이나 밤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사용하였다. 거기다 상수도 시설도 빈약하였다. 따라서 화재에 취약한 주거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용두산 공원과 주변에는 1954년 용두산 공원 대화재 이전에도 몇 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였다. 1951년 12월 5일과 1952년 1월 2일에 발생한 화재가 대표적이다.
[경과]
1954년 12월 10일 오전 3시 57분 부산시 중구 동광동 3가 43번지 의류품상을 하는 윤동근(尹東根)의 집에서 구공탄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6시 30분에 진화되었다. 그리고 1954년 12월 26일 오전 6시 20분경 부산시 중구 광복동 2가 3번지 전기 공사 청부업을 경영하는 정수홍(鄭壽洪)의 집 식모가 판잣집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 놓고 잠이 들면서 인화되어 오전 11시경 진화되었다. 이 두 건의 화재로 6·25 전쟁 때 용두산 공원에 만들어졌던 판잣집은 전부 없어지게 되었다.
[결과]
1954년 12월 10일 화재로 건물 448동·판잣집 435동을 태우고, 6,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으며, 4명이 불에 타 숨지는 피해를 입었다. 판잣집과 주택 이외에 동광초등학교 가교사, 해병대 사령부 막사를 비롯해 동양호텔, 중앙교회, YMCA 회관 등이 전소되었다.
1954년 12월 26일 화재로 판자촌 298동이 소실되면서, 용두산 일대의 모든 판잣집은 없어졌다. 이재민은 1,420여 명이었고, 1명이 불에 타 사망하였다. 피해액 397만 4000환에 달하였다. 이재민들은 동아 극장, 시민 극장, 부산 극장에 긴급 수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기·전후 부산에서의 피난민 생활의 고달픔과 도시의 난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며, 이후 도시 계획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향토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