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968
한자 朝紡罷業
영어의미역 Strike in Jobang|Jobang strike
이칭/별칭 조선방직 파업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2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석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 운동|노동 운동
관련인물/단체 강일매|전진한|이승만|대한노총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2년 3월 12일연표보기 -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52년 3월 13일연표보기 -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51년 12월 - 강일매 사장 퇴진 운동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52년 1월 21일 - 국회에서 시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1월 25일 - 국회진상조사단 조사 활동
발생|시작 장소 조선방직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2동
종결 장소 조선방직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2동

[정의]

1951년~1952년 부산의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사장 강일매(姜一邁)의 퇴진을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역사적 배경]

조선방직노동조합은 노사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1951년 3월 귀속 기업체 불하 공매를 통해 경영진과 공동으로 조선방직을 불하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1951년 4월 조방 사건으로 기존 경영진이 구속되면서 퇴진하고, 불하가 취소되어 국영 기업화되는 한편, 1951년 9월 새로운 경영자로 이승만(李承晩)의 심복 강일매가 부임하였다. 강일매는 취임 후 조선방직 내에 급속하게 자신의 세력을 부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신규 채용과 해고를 단행하고 노조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이는 조방 노조와 그 상부 기관인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錢鎭漢)]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였고, 결국 195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 조방 쟁의와 파업으로 연결되었다.

[경과]

1952년 1월 21일 국회 의사당에서 강일매의 퇴진을 주장하는 조선방직 종업원들의 기습 시위가 있었다. 국회는 조방 노조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회 차원의 진상 조사단을 꾸려서 1월 25일부터 조사를 시작하였고, 2월 29일 제24차 국회 본회의에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를 참조로 조방 쟁의와 관련한 국회 결의가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강일매의 퇴진과 노조 역시 쟁의를 중단하는 것으로 사실상 노조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대립의 정점은 국회 의원 전진한이 3월 11일 오전 국회 본회의 석상에서 3월 12일부터 조방의 총파업을 전개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전진한강일매의 퇴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파업과 함께 국제자유노련과 UN 노동 기구 등 세계 노동계에 조선방직에서의 노동 탄압을 호소할 것임도 언명하였다.

[결과]

조방 노조의 파업은 이승만이 직접 파업을 ‘공연한 시비’로 보는 경고 메시지를 대통령 담화로 발표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전진한은 파업을 24시간 시한부 파업으로 종결하고 13일부터 직장으로 복귀할 것이며, 국제 노동 기구들에 대한 제소문제도 보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파업이 실패하면서 조방 노조는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파업과 관련해서 주동자 30여 명이 검거되었고, 이 중 11명이 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와 별도로 강일매는 종업원 내에서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소속으로 전진한파로 분류되는 노동자 100여 명을 1차로 해고하고, 추가로 350명을 해고하였다. 이를 테면 조방 파업이 강일매가 조방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조방 파업이 있은 지 반년이 지난 9월, 『국제 신보』는 “해고자는 복직을 못하고 타처에도 구직하지 못하여 가두를 방황. 특히 여직공들은 밤의 여인으로 전락, 윤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4·19 혁명 이후 이들 해고된 노동자들은 1952년 파업 당시 노조 위원장이었던 박승대(朴昇臺)를 중심으로 ‘조방쟁의 피탈주권 쟁취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선방직의 상황을 1951년 3월로 되돌려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1951년 3월이란 조방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 경영진과 노조가 5대 5의 출자로 조선방직을 불하 받기로 한 시점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조방 파업은 ‘해방 후 한국식 노사 관계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주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해방 후 노사 관계는 기업과 국가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인 기형적 노사관계가 장기간 유지되었는데, 그 출발점을 조방 파업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