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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854
한자 張泰英
영어음역 Jang Taeyeong
이칭/별칭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황금의 왼팔 배달부
분야 문화·교육/체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까치고개로229번길 7[토성동 3가 1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만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야구 선수
성별
대표경력 국가 대표 야구 선수
출생 시기/일시 1929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4년 - 경남중학교 야구 선수[내야수에서 투수로 전환]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육군야구부에 들어감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제5회 군·실업 야구 쟁패전에서 11타수 9안타(0.818) 기록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국가 대표 야구 선수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상업은행 야구팀 감독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71년 - 국가 대표 야구 감독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71년 - 국민 훈장 석류장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99년 8월 2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군
학교|수학지 경남중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3가 12지도보기
활동지 부산광역시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야구 제1세대 투수.

[활동 사항]

장태영(張泰英)은 1929년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와 성장하였다. 1944년 경남중학교에 입학하여 유도부에 가입했다가 야구단이 생기자 창단 멤버로 들어갔다. 내야수에서 왼손 강속구 투수로 변신하여 1947년, 1948년 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경남중학교를 우승으로 이끌며 해방 이후 중학 야구 최초이자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170㎝에도 미치지 못한 작은 키였지만, 시속 140㎞의 강속구로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 ‘황금의 왼팔 배달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최고의 왼손 투수로 각광받았다.

대학 졸업 후 현 상무야구단 전신인 육군야구부 선수로 박현식, 정성용, 이병하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군·실업 야구 쟁패전[백호기 전국 종합 야구 선수권 대회의 전신] 1~5회에 육군야구부로 출전하였고, 1959년 제5회 대회 때의 11타수 9안타, 타율 0.818의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57년에는 현역 신분으로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약하였다.

1960년 군 복무를 마친 후 상업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잠시 야구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1961년 교통부 야구부 조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하였고, 1962년부터 10년간 상업은행 야구팀 감독을 역임하였다. 1971년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아 제10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1974년 가칭 ‘한국직업야구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82년 한국야구위원회 규칙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내 아마추어 야구 행정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 외 아시아야구연맹 기술위원장도 맡은 바 있다. 1999년 8월 2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백구와 함께한 세월-장태영 야구 인생 70년』[도서출판 홍, 1998]이 출간되었다.

[상훈과 추모]

제10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공을 인정받아 1971년 국민 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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